게르하르트 슈뢰더 지음 / 김소연 외 옮김 / 메디치 / 464쪽 / 2만6000원
2003년 진보 성향 슈뢰더 총리
복지 축소·노동 유연성 확대 등 지지층 반대하는 개혁 나서
국민적 반발로 재집권 못했지만 '유럽의 병자' 독일 재도약 발판
메르켈 "국가 부흥의 출발점"
[ 서화동 기자 ] 2003년 3월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사진)는 연방하원 본회의에서 ‘아젠다 2010’이라는 개혁정책을 발표했다. 노동, 산업, 조세, 환경, 이민, 교육 등 광범위한 분야의 개혁안이었다. 특히 해고 요건 완화 등을 통한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실업수당과 연금·건강보험 등 각종 사회복지비용 축소, 65세에서 67세로 정년 및 연금 수혜 시기 연장 등은 자신의 지지층까지 등을 돌리게 했다. 슈뢰더가 속한 사회민주당과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은 물론 국민적 공분을 살 만큼 매우 불편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슈뢰더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사민당의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와 연금 수령자들은 “슈뢰더는 기독교민주당(야당) 명예당원”이라며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슈뢰더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대책으로는 통일로 인한 사회경제적 후유증을 치유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였다. 당시 독일은 1800만 명의 동독 사람들이 새로 독일 국민에 포함됐는데도 과거의 사회보장정책과 고용노동정책, 산업정책을 그대로 쓰고 있어 체제의 근본적인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슈뢰더 집권 2기 첫해인 2002년 실업률은 14%에 달했고, 경제성장률은 -0.1%였다. ‘유럽의 병자’라는 달갑잖은 별칭이 나올 정도였다.
슈뢰더의 개혁은 독일 경제가 재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수많은 일자리가 생겼고, 독일 경제는 부활했다. 이른바 ‘적록연정’(사민당+녹색당)은 개혁정책에 대한 국민적 반발로 무너졌다. 하지만 슈뢰더의 뒤를 이은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연합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취임 후 첫 의회연설에서 “아젠다 2010으로 새 시대의 문을 열게 해준 전임 슈뢰더 총리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2015년 슈뢰더의 전기 출판기념회에서도 메르켈은 “오늘날 독일이 이렇게 부흥한 출발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슈뢰더의 개혁정책 아젠다 2010”이라고 다시 한번 찬사를 보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자서전》은 슈뢰더 전 총리가 자신의 굴곡진 성장기부터 정치 입문과 도전, 국제평화를 위한 비전과 노력, 두 차례의 집권기에 추진한 개혁정책 등을 상세히 되짚은 책이다. 나치독일 군인으로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사한 아버지, 영국군 점령부대에서 근무하다 병을 얻은 의붓아버지, 항상 배가 고프던 어린 시절, 철물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청년기, 통일독일이 맞게 된 새로운 과제와 도전 등의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이어진다.
7년에 걸친 적록연정의 과정과 뒷이야기는 오늘의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2년 9월 박빙의 승리로 제2기 녹색연정을 수립한 슈뢰더는 서독 정부 수립 후 50년간 손보지 않은 사회보장 시스템 등 당시 제도로는 독일의 재도약이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이듬해 ‘아젠다 2010’을 발표한 그는 사민당의 지역별 콘퍼런스를 비롯한 수많은 모임에서 몇 시간씩 참석자들과 토론하고 설득했다.
2000년 6월 원자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내용의 핵합의 타결도 마찬가지였다. 녹색당과의 연립정부는 물론 에너지 공급사들과도 오랜 협의를 거쳐 합의에 도달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해당사자를 모두 참여시켜 합의를 이루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과정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정치가는 바로 이런 일을 하라고 있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탈원전’을 군사작전 하듯 밀어붙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꼬집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이 책은 ‘문명국가로의 귀환’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독일은 전범국가다. 유럽 각국에 역사적 빚을 지고 있다. 슈뢰더는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되 통일독일은 유럽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소보와 아프가니스탄에 전후 처음으로 독일 군대를 파병했지만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전쟁에는 명분이 없다며 프랑스 러시아와 연대해 참전을 거부했다.
요즘 독일에선 슈뢰더가 유럽연합의 제재 대상인 러시아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트의 고위직을 맡을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거세다. 전직 국가지도자의 개인적 돈벌이가 지나치다는 얘기다. 지난 30일 빌트지는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48.7%가 슈뢰더를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9월24일 총선을 앞두고 열세에 놓인 사민당이 곤혹스러운 처지다.
슈뢰더는 왜 러시아에 밀착하고 있을까. 책에 해답의 실마리가 나와 있다. 슈뢰더는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면서 ‘독일어를 잘하고, 독일을 너무도 잘 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인간적인 신뢰를 깊이 쌓았다. 이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것보다는 교류·협력하는 것이 평화를 위한 길이라고 슈뢰더는 주장한다. 나치독일의 침공으로 옛소련에서만 최소 2700만 명이 희생된 점, 옛소련이 동유럽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역사적 부채의식도 러시아에 대한 슈뢰더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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