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악역이다. 혹자는 이종석의 도전을 보고 무모하다 할 수도 있다. 관객이 자신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지 잘 알면서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새로운 변신에 모험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하나로 인해 그동안 쌓아온 선한 이미지가 바뀔 수 있다는 위험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오로지 연기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전혀 계산하지 않았다.
이종석은 최근 서울 삼청동 모처에서 기자를 만나 영화 비하인드 스토리와 연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이야기했다.
이종석이 출연한 '브이아이피'(감독 박훈정)는 대한민국 국정원과 미국 CIA의 기획으로 귀순한 북한 고위 간부의 아들 김광일(이종석 분)이 연쇄살인 용의자로 지목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시나리오를 직접 구해서 본 뒤 찾아갔다. 감독님에 대한 신뢰도 있었고, 내가 해온 것과 확연히 다른 역할이라 기대와 욕심이 생겼다. 관객들이 내 이미지를 좋아해 주셔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아르 영화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라서 꼭 해보고 싶었다."
극 중 이종석은 북에서 온 귀빈 VIP 김광일 역을 맡아 섬뜩하게 웃음 짓는 살인마를 연기했다. 이종석만의 악역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북한 사투리부터 영어 연기까지 다양하게 소화해내고 스산한 미소로 관객들을 소름 돋게 만들어 연기 호평을 받았다.
"살인하는 장면이 첫 촬영이었다. 나도 그 신을 찍으면서 불편했고 속도 안 좋았다. 하지만 그 장면이 없었다면 모두가 김광일에게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이코패스를 조금이라도 다르고 새롭게 표현하고 싶었다. 역할이 만족스러워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종석은 장동건, 김명민, 박희순 등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연기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는 선배들이 가진 장점을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영리한 배우였다. 김명민이 이종석을 '여우'라고 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배님들과 작품을 하면서 확실히 순발력이 늘었고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정체기가 있었는데 선배님들과 연기를 하고 나면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기게 된다. '관상' 때는 내성적이라서 선배님들께 감히 여쭤볼 생각을 하지 못 했는데 이번에는 대놓고 '모르겠다',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게 바로 이종석의 성장 비결이었다. '브이아이피'는 지난 23일 개봉해 2주차 장기 흥행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이종석이 한 단계 더 성장하는 작품이 된 것은 확실하다.
"'브이아이피'로 모험을 걸었다. 나에게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 이런 역할 자체가 내 나이 또래에 없었고 나도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다. 아마 이종석의 마지막 악역이 되지 않을까."
한예진 한경닷컴 기자 geni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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