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10년 11월25일 선고, 2009두9543 판결)
기존 판례
제조업자가 유통업자에게 "일정가격 이하로 판매 말라" 강요땐 '그 자체로 위법' 간주
대법원 판결
시장상황 따라 경쟁 촉진하면 '재판매가격 유지' 예외적 허용
생각해 볼 점
기업행위 법적 판단은 신중해야…공정거래법 적용 때 경제분석 필요
제조업자가 자신이 만든 상품을 유통업자에게 팔면 그 상품의 소유권은 당연히 유통업자에게 넘어간다. 상품을 소비자에게 얼마에 판매할지는 소유자인 유통업자가 결정할 문제다. 소유자가 아닌 제조업자가 유통업자에게 얼마 이하로 판매하지 말라는 ‘(최저)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제조업자의 ‘갑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공정거래법 제29조에서도 ‘사업자는 (최저)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단정적으로 규정하며 금지하고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위법이라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와 법원도 이렇게 해석해왔다. ‘당연위법 원칙(행위의 존재만으로 위법하다고 간주)’을 적용해온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0년 말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합리의 원칙(경쟁이나 소비자 이익에 대한 영향을 분석·평가해 위법성 여부를 판단)’을 적용해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가 정당한지를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위법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업 행위가 오히려 합리적 행위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위법하다고 단정짓지 말라는 것이다.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는 당연위법?
대법원 판결의 사실관계는 이렇다. 제약회사 H는 자신이 생산한 보험의약품을 도매상에 제공하면서 도매상이 보험약가 이하로 요양기관(병·의원, 약국)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다. 위반 시 계약을 해지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H사의 행위가 공정거래법상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에 해당해 위법하다며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원고인 H사는 실거래가 상환제도를 적용하는 보험의약품 유통시장에서는 어차피 가격 경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격 경쟁 촉진을 위한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 금지제도는 배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거래가 상환제도 아래에서는 정부가 고시한 상한금액 이내에서 요양기관이 실제로 구입한 의약품 가격 그대로 상환해준다. 따라서 요양기관이 전문의약품에서 이윤을 취하는 것이 금지된다. 이런 상황에서 도매상에 보험 상한금액인 보험약가대로 공급하라고 요구한 취지는 도매상으로 하여금 요양기관에 불법적 리베이트를 제공하지 말라는 취지였으므로 정당하다는 것이 H사의 주장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원고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당연위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경쟁 촉진을 통한 소비자 후생 증대’라는 ‘공정거래법의 입법 목적’을 고려할 때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가 보기와는 달리 경쟁을 촉진하는 정당한 경우가 있을지 모르므로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고 봤다.
시장실패 현상 치유수단 될 수 있어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는 유통업자 간의 가격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소비자가 저렴한 가격으로 상품을 구입할 기회를 박탈하므로 명백히 경쟁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행위가 오히려 경쟁을 촉진하는 경우가 있을까? 대법원은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가 ‘상표 내 경쟁’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라도 시장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상표 간 경쟁’을 촉진시켜 결과적으로 소비자 후생을 증대할 수 있으므로 예외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런 사례일 것이다.
유통업자 A는 제조업자에게 구매한 상품의 판매 촉진을 위해 제품 정보를 적극 홍보하고 매장을 방문한 소비자에게 각종 음료와 편의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해보자. 비용을 들여 판매 전 특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상품을 구입할 수 있어 소비자 후생은 증가한다. 상품의 브랜드 이미지 역시 좋아진다.
그런데 동일한 제조업자의 상표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유통업자 B가 가격을 할인해 판매하면 소비자들이 판매 전 특별 서비스는 A에게서 받고 실제 구입은 B에게서 할 것이다. 판매 촉진을 위한 이런 서비스는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므로 B는 A가 제공한 서비스의 혜택을 공짜로 누리며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시장실패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모든 유통업자가 적극적으로 판촉 활동하는 것을 꺼릴 것이다. 판매 부진과 상품 브랜드 이미지 실추 등으로 제조업자도 피해를 볼 것이다.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는 이런 시장실패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당연위법 아니라 합리의 원칙 적용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로 동일 상표 상품을 판매하는 유통업자 간의 가격 경쟁은 제한되지만 판매 촉진을 위한 서비스 활동이 활발해져 오히려 서로 다른 브랜드 상품 간의 경쟁은 촉진할 수 있다. 소비자 후생도 당연히 증가한다. 물론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동일 브랜드 내에서의 경쟁 제한 효과와 브랜드 간의 경쟁 촉진 효과 중 어느 것이 더 클지는 구체적인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관련 시장에서 △상표 간 경쟁이 활성화돼 있는지 △그 행위로 가격 이외 소비자에 대한 유통업자들의 서비스 경쟁이 촉진되는지 △소비자의 상품 선택이 다양화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판단 기준에서 볼 때 본 사건에서 H사의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에는 위법하다고 판단했지만 당연위법 원칙이 아니라 합리의 원칙을 적용한 결과이므로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정당한 경우인지를 두고 앞으로 많은 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
이미 소유권을 넘긴 상품의 판매가격을 제한하려는 것은 비정상적이고 반경쟁적이며 반시장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역설적으로 시장실패 현상을 치유해 경쟁을 촉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오랜 경쟁법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도 1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기업 행위에 대한 법적 판단은 신중해야
법경제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겨 199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널드 코스 교수는 “경제학자와 법학자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기업 관행을 보면 독점의 관점에서만 설명하려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고 염려한 바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법원 판결이 코스의 이런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나아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많은 기업 규제 관련 법들이 점점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기업 행태를 외형적으로만 판단하며 당연위법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의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위법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며 ‘합리의 원칙’을 적용한 이번 판결의 취지가 모든 기업 활동의 법적 판단에 폭넓게 적용돼야 할 것이다.
■ 100년 만에 '합리의 원칙' 적용한 美 '리긴 판결'
대법원 판결은 미국 연방대법원 ‘리긴(Leegin) 판결’의 영향을 받았다. 100년 동안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를 당연위법으로 보던 것을 2007년 합리의 원칙으로 변경한 판례다. 연방대법원은 규제의 행정적 편의를 위해 철저한 경제분석 없이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를 당연위법으로 본다면 경쟁 촉진적인 행위까지 금지될 수 있으므로 합리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오랫동안 당연히 부당하다고 인식돼온 기업 행위가 정당한 행위일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경제학적 사고를 통해 기업 현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적 판단에 경제학적 사고를 동원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결론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 정당하고 부당한지를 법적으로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최근의 경제 환경에서 기업 현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훌륭한 수단임은 분명하다.
신석훈 < 김앤장 법률사무소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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