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칼퇴근을 돈 주고 샀습니다"…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 열풍

입력 2017-09-11 17:00  

월급만 많이 받으면 뭐해요
잦은 야근에 몸·정신 망가져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회의도

이직한 뒤 비로소 내 삶 찾아
여행도 훌쩍, 데이트도 자유롭게
"월급 20% 줄었지만 만족"

선배 세대는 '격세지감'
"한창 일할 나이에 쉴 생각만…열정 갖춘 동료 비웃지말아야"



[ 고재연 기자 ]
서울 명문대 약대를 졸업하고 글로벌 제약회사에 다니던 김모씨(33). 그는 취직 후 이른 아침에 출근해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생활을 2년 넘게 하다 지난해 말 사표를 냈다.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회사를 떠난 뒤 동네 약국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다. 근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루 다섯 시간으로, 제약회사를 다닐 때와 비교해 절반가량 줄었다. 생활비가 빠듯하거나 목돈이 필요할 때만 시급이 높은 대학병원 앞 대형 약국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다. 버는 돈은 줄었지만 대신 여유가 생겼다. 두세 달에 한 번쯤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강아지도 네 마리나 키우고 있다. 대학 동기생들은 대형 제약사에서 일하거나 개인 약국을 개업해 큰돈을 벌고 있지만, 김씨는 전혀 부럽지 않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회사 일에 매달려 지내는 것보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여유롭게 생활하는 게 훨씬 행복하다”고 말했다.

야근하는 대기업보다 파트타임 선호

예전 같았으면 ‘인생의 패배자’로 간주될 만한 김씨의 모습은 요즘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젊은 직장인들이 돈이나 지위를 좇기보다 삶의 질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 세 단어의 첫 발음을 딴 ‘워라밸’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임시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가 하면, 이전보다 월급이 100만원 넘게 줄어도 개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기업으로 이직을 결심하는 경우도 많다.

2년 전 로스쿨을 졸업하고 꿈꾸던 대형 로펌에 들어간 송모씨(31)가 대표적 사례다. 입사의 기쁨도 잠시였다. 송씨는 원하던 인수합병(M&A) 부서에 들어갔지만 밤낮없이 일만 해야 했다. 저녁 약속 후에도 회사로 돌아가 일하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 새우잠을 자기 일쑤였다. 연봉은 비교적 높았지만 반복되는 야근에 신물이 났다. 결국 그는 사표를 던지고 비교적 출퇴근 시간이 명확한 증권사 법무팀으로 이직했다. 월급도 줄고 사회적 대우도 예전 같지 않지만 송씨는 “건강과 행복을 되찾았고 데이트할 시간이 나서 여자친구도 생겼다”며 만족해했다.

일본 호주 등으로 떠나 자발적 ‘프리터(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로 사는 젊은이도 많아지고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통하는 장모씨(33)는 배낭여행을 하다 일본인 여자친구를 사귀어 결혼에 ‘골인’했다. 장씨는 부인을 따라 일본에 정착했다. 지금은 지방은행에 다니는 부인을 뒷바라지하면서 스키장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보태며 살고 있다. 그는 “일본은 상대적으로 시급이 높아 저축을 못 할 뿐 아르바이트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다”며 “좋아하는 스키도 마음껏 타고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돈 덜 받아도 여유가 좋아

사람다운 삶을 위해 돈은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게 워라밸을 추구하는 젊은 직장인들의 생각이다. 10대 그룹 계열사에 다니던 권모 과장(38)은 지난해 말 규모는 크지 않지만 기업문화가 좋기로 소문난 중견 외식기업으로 옮겼다. 급여는 20% 정도 줄었지만 ‘오후 6시 칼퇴근을 돈 주고 샀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권 과장은 지난해 야근하다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이후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이직을 한 이유다.

시급으로 따지면 시간당 받는 돈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게 권 과장의 생각이다. “이전 회사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돈 쓸 시간’이 없어 통장에 쌓아놓기만 했어요. 지금 회사에서는 체육활동지원비를 받아 저녁에 헬스도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기분이 듭니다.”

조금 덜 바쁜 직장으로 옮기면서 일의 보람을 찾은 사례도 있다. 서울 명문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병원에 취직했던 최모씨(30)는 3교대 근무 5개월 만에 그만뒀다.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돌보려고 간호사가 됐는데 보람을 생각할 짬조차 낼 수 없다는 자괴감이 든 탓이었다. 퇴근 후 쓰러져 잠만 자던 최씨는 병원을 나온 뒤 모 기업의 의료실 사내 간호사로 옮겼다. “연봉은 1000만원 정도 줄었지만 간호 일의 재미를 찾았다”며 만족해했다.

‘워커홀릭’ 선배들과 갈등도

A회계법인에 근무하는 임모씨(43)는 요즘 젊은 회계사들의 모습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난 3월 경쟁사인 B회계법인이 부실감사에 대한 책임으로 1년간 감사업무 신규 계약 금지 처분을 받자 곧바로 ‘스카우트 작전’에 들어갔는데, ‘러브콜’을 받은 B회계법인 젊은 회계사들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면서다. B회계법인의 젊은 회계사들은 “업무 강도가 높은 회계사의 직업 특성상 언제 이런 안식년을 누리겠느냐”며 A회계법인의 스카우트를 고사했다는 후문이다.

임씨는 “우리 때 같았으면 한창 일할 나이에 더 좋은 기회를 찾아 곧바로 이직했을 것”이라며 “젊은 회계사들이 ‘좀 더 쉬겠다’며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는 모습을 보며 시대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씁쓸해했다.

워라밸을 추구하는 분위기로 인해 직장 내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 중견기업에서 일하는 박모 과장(35)은 최근 회사에서 열심히 일한다고 소문난 고참 대리를 “바보 같고 한심하다”며 흉보는 후배들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기 업무에 열정을 갖고 일하는 동료나 선배들을 ‘자기 권리도 못 찾는 한심한 직장인’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다. 박 과장은 “좋은 성과를 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며 “업무 시간마다 주말에 놀러갈 계획만 세우는 동료들이 워라밸을 운운하는 것도 한심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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