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저출산 대응 등 공시 범위 확대
일정 규모 이상 기업에 내년부터 적용
원장 직속 금융소비자보호위원회 설치
[ 이태명/정지은 기자 ]
첫 민간 출신 금융감독원장인 최흥식 원장이 11일 취임 일성으로 ‘소비자 중심의 금융감독’을 강조하고 나섰다. 금융회사 건전성 감독에 치중했던 금감원의 역할을 소비자 보호 쪽으로 선회하겠다는 의미다. 사회적 책임(CSR)을 다하는 이른바 ‘착한 기업’을 국민·투자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공시제도를 개편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은행 등 금융회사에 대해선 “대형화 경쟁과 수익성을 높이는 데 치중해 금융 본연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U식 ‘착한 기업 공시제’ 도입
최 원장은 이날 금감원의 정책방향을 제시하면서 기업공시제도를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저출산 대응 노력, 환경보호, 노사관계 등의 사항을 공시하게 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을 국민과 시장이 알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유럽연합(EU)식 기업공시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EU는 2014년 기업이 비(非)재무적 성과까지 공시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마련해 내년부터 시행한다. 종업원 수 500명 이상인 상장·비상장 기업에 대해 연차보고서에 환경, 사회, 종업원 관련 CSR 성과와 인권, 반(反)부패, 뇌물 등의 연루 여부를 알려야 한다는 게 EU 공시 개편안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을 대상으로 사업보고서에 CSR 성과를 자율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공시에 포함할 CSR 항목으로 노사관계, 환경보호, 저출산 대응 노력, 유연근무제 등 일·가정양립 지원제도 등을 검토 중이다. 노사관계의 경우 파업 등 노사 간 갈등이 심각한지, 불법 노동행위가 있었는지 등을 공시하게 하는 방안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방침이 구체화되면 상당한 논란을 초래할 전망이다. 당장 공시를 통해 ‘착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을 알리겠다는 구상 자체가 과도한 경영개입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금감원은 “CSR 성과가 있는 기업만 자율적으로 공시하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기업들 사이에선 ‘착한 기업 줄세우기’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산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서도 CSR 성과 공시를 의무화한 곳은 EU뿐”이라며 “기업의 설립 목적은 엄연히 이윤 극대화”라고 꼬집었다.
◆“금융소비자 보호가 최우선”
최 원장은 금감원의 역할과 기능 재편 방침도 밝혔다. 원장 직속 자문기구로 금융소비자보호위원회(가칭)를 설치해 금융소비자 보호 중심의 금융감독을 실천하겠다고 했다. 금감원 내부에 있는 금융소비자 보호 기능을 따로 떼어내 별도 전담기구를 설치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구체화하겠다는 얘기다. 그는 “금융소비자는 금융시스템의 거대한 축이자 금융회사의 지속 가능 성장을 위한 근간”이라며 “금감원이 앞장서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고 필요할 경우 피해 구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 설치될 소비자보호위는 새 감독제도를 시행할 때 소비자 보호 관점에서 적절한지 심의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위원회의 절반가량을 시민단체, 학계, 언론인으로 구성키로 했다.
최 원장은 문 대통령의 공약인 금융감독 체계 개편과 관련해선 “현행 법·제도 내에서 금융위의 권한을 철두철미하게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정부 조직개편을 통해 금융정책 및 감독 기능 분리 여부가 결정될 때까지 ‘감독집행기관’이란 금감원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는 또 “감독당국의 권위와 위엄은 금융회사를 윽박지르는 게 아니라 전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며 “원칙과 기본에 충실한 금감원이 돼야 한다”고 임직원들에게 강조했다.
이태명/정지은 기자 chihir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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