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생민 신드롬의 코드는 '균형'이다

입력 2017-09-15 19:30  

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 김희경 기자 ]
“지금 저축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꼭 미래에 일어날 일만은 아니다. ‘하기 싫은 일’은 누군가에겐 현재다. 은퇴 후에도 어쩔 수 없이 궂은일을 하는 어르신. 원치 않는 일에 상사 스트레스까지 받고 있지만 퇴사하지 못하는 직장인. 꿈은 뒤로하고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쓰는 구직자까지. 이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여러 이유 중 돈은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개그맨 김생민의 이 말은 네티즌 사이에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왜 돈을 미리 모으지 않았을까’ 하는 자조적인 목소리와 함께.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기쁨은 모두 유예해야 할까. 김생민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지난달부터 KBS에서 선보이고 있는 예능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그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클럽에 간 시청자의 영수증을 본 뒤 ‘그뤠잇(great)’을 외치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열심히 살면 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대신 숙제를 준다. “적금 만기 해지의 기쁨을 느껴보라”고. 오늘과 내일의 나를 만족시키는 균형 잡힌 하루를 쌓아올리라는 얘기다.

‘김생민 신드롬’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20~40대에게는 그만큼 화제의 인물이 됐다. ‘스튜핏(stupid)’ ‘그뤠잇’을 오가며 펼쳐지는 그의 시원한 판단과 이에 열광하는 시청자들. 여기엔 ‘균형’이란 코드가 숨어 있다. 단순히 소비의 균형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오늘의 적당한 행복을 누리면서 미래를 위해 나머지 행복을 유예시키는 것, 즉 심리적 균형을 찾아가려는 의지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김생민 신드롬은 여기서 출발한다.

한국인들은 급격한 경제 성장과 침체를 겪으며 결핍과 충동에 사로잡혀 왔고, 이는 소비 성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엔 ‘잘 살아보세’란 구호에 맞춰 허리띠를 졸라맸다. 행복은 자식들에게 양보하며 노동에 매진하는 ‘호모 라보르(일하는 인간)’의 탄생이었다. 어느 정도 살 만해지자 사람들은 공허해졌다. 그 외로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됐다. 한때는 명품에 열광했고, 최근엔 ‘욜로(인생은 한 번뿐이란 뜻)’란 이름으로 여행과 같은 일시적 행복과 체험에 돈을 쓰고 있다. 소비 관련 용어엔 격한 감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충동 소비를 하는 ‘시발비용’이란 용어가 그랬다. 그러나 깨닫기 시작했다.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소비하고 있지만 결핍과 불안이 동반된 이유다.

김생민은 이런 불완전한 소비패턴에 ‘작은 개입’을 시도한다. “커피는 선배가 사줄 때 먹는 것” 같은 소소한 지적이다. 평소 개인의 소비패턴에 개입하는 사람은 드물다. 가장 가까운 부모님이 얘기를 해주는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부모님이 만약 똑같은 얘기를 했다면 왠지 과거 세대의 고리타분한 잔소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김생민의 지적에는 거부감이 덜하다. 객관적 주체이고, 유머까지 들어 있어서다. 때론 굳어버린 소비패턴에 작은 변화를 가져다 줄 조언자로 받아들인다.

김생민만의 심리적 균형도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배우 정상훈이 무명으로 고생하던 시절 공연을 할 때마다 돈봉투를 쥐여줬다고 한다. 본인의 행복과 아끼는 사람들의 행복을 함께 지키려는 태도는 소비를 부추기는 외로움을 처음부터 차단한다.

어쩌면 이 순간 국내의 많은 마케터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욜로’는 물론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란 말까지 결국 마케터들의 전략과 연결돼 있다. 새로운 트렌드 용어처럼 보여도 합리적 소비를 가장한 충동 소비를 이끌어내려는 작위적 요소가 담긴 것이다. 밤늦게 홈쇼핑을 보다가 떡갈비를 구매한 시청자에게 “그 시간에 잠을 자라”고 조언하는 김생민을 보며 마케터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서서히 심리적 균형을 찾으려는 소비자와 이를 흔들고 싶어 하는 마케터. 이 승부에서 항상 지고 말았던 무른 소비자들이 이젠 조금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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