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야근후 몸살 기운을 느끼며 집에 왔는데 날 맞는 아이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머리를 짚어보니 열이 느껴졌다. 체온계를 귀에 대보니 38.2도. 해열제를 먹이면 잠시 내리는 듯하다가 다시 올라 38.6도...아이 걱정에 밤잠을 설쳤고 소아과에 데려갔다가 출근을 해야 할 것 같다.
'오전 10시 잡힌 미팅은 미루는 수밖에 없겠군.'
여러 사람과 정한 약속을 연기해야 해서 마음이 불편하고 몸살은 더 심해진 상태라 짜증이 절로 났다.
"엄마가 빨리 밥 먹으랬지! 왜 이렇게 꾸물거려! 유치원을 안 가면 어떡할 건데! 엄마는 오늘 바쁜 날이라고! 어휴, 아직 양말도 안 신었어?"
이른 아침 소아과를 들르려면 평소보다 서둘러야 하는데 아이는 자꾸 누우려 하고 밥에도 통 관심이 없다.
열이 나고 배가 아프다고 한다고 말씀드리자 의사선생님께서는 하루치 약을 처방을 해주셨다. 내일 다시 나와서 경과를 보자는 말씀과 함께.
'내일 또? 휴~'
맞벌이 부부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바로 독감과 수족구. 전염성 질환이라 일주일은 등원할 수 없기 때문에 불시에 연차를 소진하게 되는 아주 중차대한 사건(?)이다.
내심 수족구가 아닌 것에 그나마 안도하며 약국 의자에 앉아 급히 해열제부터 먹였다.
여지껏 이렇게까지 칭얼거린 적은 없었는데 아이는 자꾸만 "오늘 하루만 유치원 쉬고 싶어요. 안가면 안돼요? 집에 가고싶어요"라고 보챈다.
안쓰러운 마음에 살살 달래기도 하고 혼을 낼 것처럼 으름장도 놓았다가 풍선껌 사줘가며 겨우 유치원 앞까지 데려왔다. 아이를 밀어 넣고 점심 약은 선생님께 전달했다.
"열이 좀 있어서 병원에 다녀오느라 늦었어요. 이따 약 좀 챙겨 먹여주세요."
"네네. 어머님~"
바쁘게 회사로 향해서 일을 보고 오후 미팅을 준비 중인데 유치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가 집에 가고 싶어 하는데요. 혹시 일찍 데리러 오실 수 있을까요?"
"앗! 선생님.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요. 죄송해요 ㅠ."
"춥다고 해서 이불을 덮어줬어요."
"네. 그럼 누워서 쉬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어머님~"
한여름인데 이불까지 덮어줄 정도로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말에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후에 인터뷰 잡힌 것도 있고 미팅도 2건이 더 있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났을까.
아까와는 달리 다급한 목소리의 선생님.
"어머님! 아무래도 ○○이 당장 병원에 데려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일단 원장님 차로 태워갈테니 어머님도 병원으로 오세요!"
가슴이 쿵 내려앉는것 같았다. 너 그정도로 아픈 거였니?
약속시간이 20분도 채 안 남은 상태였지만 경황없이 양해를 구하고 어떤 정신으로 운전했는지도 모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침대에 기운 없이 누워있던 아이는 나를 보자 반갑다는듯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줬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의사선생님께서는 열이 42도라면서 당장 큰 병원으로 가라고 재촉하셨다.
'엥? 42...도?'
아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처음엔 묻는 말에 대답도 하던 아이가 도착할 즈음엔 헛소리를 하며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겁이 나니까 손이 벌벌 떨리고 신호등이 초록색인지 빨간색인지 보이지 않았다. 들쳐안고 응급실로 뛰어들어가는 찰나 아이는 내 어깨에 구토를 하더니 의식을 잃었다.
응급실에서 MRI와 뇌척수액 검사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회복실로 이동한 딸은 내 얼굴도 알아본다. 이젠 살았구나 싶었는데 물 한 잔 마시더니 또 토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쉬고 싶다는 애를 엄마 회사 가야 한다고 억지로 유치원 밀어 넣은 것도...아침에 내 몸 안 좋다고 양말 빨리 신으라고 윽박지른 것도 미안해서 자꾸 눈물이 났다.
담당 선생님은 의사 생활하면서 열이 42도인 환자는 처음 봤다면서 염증수치가 정상의 500배에 달하는 상태고 정확한 병명은 5일이 지나야 나올 거라고 하셨다.
그 말인즉슨 5일 이상은 여기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결국 내일부터 한 명의 워킹맘이 출근을 못한다는 뜻이었다.
하루라 생각하면 오히려 걱정됐을 수도 있는데 일주일 이상이라 생각되는 순간 오히려 모든 것이 다 내려놓아지며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입원한 아이는 며칠동안 열이 계속됐고 병명도 확실치 않은 상태라 이것저것 다양한 항생제를 투여받았다.
남편은 물론 내 회사도 어느때보다 바쁜 시기였지만 아이의 입원이라는 불가항력 요인 앞에서 서로 합심해 휴가를 번갈아 내가며 아이 병수발(?)을 치러냈다.
남편과 내가 부부이고 위기에 공동대응하는 하나의 팀이라는 결속력은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만큼 절실히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출장도 가야해서 자기 옆에서 같이 자자는 아이를 무정하게 떼어놓고 등 돌려 나올 때는 주책맞게 눈물도 흘렀다.
일이 뭐고 회사가 뭐길래...아픈 딸 원하는대로 못해 주고 출장이라니.
53병동 생활한지 5일만에 늘 '안먹어' 하던 딸은 처음으로 '배고프다'는 말을 했고 바퀴달린 링거 행거를 혼자 끌어보겠다고 하는 등 활기를 되찾았다.
유치원을 빠진다는 게 기뻤는지 선생님이 가져다 주신 친구들의 '빨리 나아서 유치원서 만나자'는 편지가 좋았는지 아이는 마냥 즐거워보였다.
염증수치는 하루하루 떨어졌고 같은 날 입원한 병실 동갑친구와 처음으로 여유있게 얘기도 나눌 정도로 호전됐다.
처음엔 서로 컨디션이 안좋은 관계로 소 닭보듯 지내더니...
퇴원 앞두고 같이 휴게실서 끝말잇기를 하던 아이들.
"모자", "자전거", "거북", "…."
말이 막혀버린 친구는 "나 이제 안 놀아!"하고 쌩 가버렸고 딸은 혼잣말로 '북소리도 있는데'하며 아쉬워했다.
그렇게 입원 동기들은 하나 둘 퇴원하고 꼬박 14일을 입원한 끝에 우리에게도 퇴원허락이 떨어졌다.
"엄마, 아빠가 회사도 안가고 귀찮은 동생도 없으니까 너무 좋았는데…."
첫째라서 항상 동생도 잘 보고 의젓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은 사랑을 더 받고 싶은 아이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예방주사 목록에나 있는 명칭이지 내 가족과 연관지어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뇌염'.
그 이름은 그렇게 불쑥 우리 집을 찾아와 허리케인이 지나가듯 휩쓸고 갔다.
퇴원 후 아이는 건강하게 다시 등원하고 나도 회사로 복귀(?)했다.
'아 별일 없는 일상이 이렇게 행복일 수 있구나."
하지만 자식이 뇌염에 걸린줄도 모르고 유치원에 떠밀어 넣은 죄로 '죄인 아닌 죄인'이 된 나는 지금도 가끔 아이 앞에서 작아진다.
콧물이 살짝 나기만해도 "엄마! 나 내일 유치원 안가면 안 돼? 그때도 나 아프다는데 엄마가 유치원 억지로 보내서 입원했자나"하며 협박(?)을 하곤 하는 딸.
"아휴,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유치원은 가야 돼. 엄마 회사에 중요한 약속 있어."
그렇게 아슬아슬한 외줄 타듯 워킹맘의 하루는 간다.
※오늘의 실전팁 3
아이가 살짝 아플때 - 약 먹여 보낸다.
조금 많이 아플때 - 전염병 아니면 약 먹여 보낸다.
입원해야 할때 - 방법없다. 회사 못나간다고 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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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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