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60년

입력 2017-09-25 18:23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뉴욕 맨해튼 서부 허드슨 강변의 웨스트 사이드 지구. 화려한 5번가의 빌딩 숲 뒤편에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다. 195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도착했지만 희망 없는 삶에 지쳐 하루하루 연명하던 이방인들. 이들의 애환과 사랑을 다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1957년 9월26일 브로드웨이 윈터 가든에서 첫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1년3개월 만에 734회 공연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이듬해 말 극장을 바꿔서도 1039회 연속 공연 기록을 세웠고, 토니상 3개 부문을 거머쥐었다. 1961년에는 나탈리 우드 주연 영화로 제작돼 아카데미 11개 상을 휩쓸었다. 1989년부터 한국 안무가들도 여러 번 무대에 올렸다. 2006년엔 브로드웨이팀이 내한하기도 했다.

내용은 이탈리아계 폭력집단 ‘제트파’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조직 ‘샤크파’의 세력 다툼, 그 사이에 말려든 토니와 마리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현대 감각을 입혔다. 제작진도 화려했다. 현대무용 거장 제롬 로빈스가 연출·안무, 명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 아서 로렌츠가 대본, 스티븐 손드하임이 작사를 맡았다.

처음 제목은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였다. 로빈스와 로렌츠는 뉴욕 남동쪽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소녀와 유대인 소년의 갈등을 그리고자 했으나 6년 동안 진척을 보지 못했다. 로렌츠와 번스타인이 만나 서쪽의 이주민 갈등을 그리기로 하면서 제목도 바뀌었다. 해묵은 두 집안 대결은 당대의 사회적 갈등으로 대체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무엇보다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코믹 뮤지컬이 아니라 비극을 다룬 실험작이었던 데다 드라마·음악 위주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춤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 새로운 뮤지컬에 환호했다. 길거리 젊은이들의 언어를 절묘하게 녹여낸 가사도 흥행에 한몫했다.

더 인기를 끈 것은 마리아의 명대사였다. 샤크파의 총에 토니가 숨진 뒤 마리아는 그 총을 받아 들고 외친다. “너희들 모두가 토니를 죽였어. 우리 오빠와 리프도. 총이나 총알이 아니라 증오로!” 이후 마리아 품속의 토니를 옮기려고 두 진영이 힘을 합하면서 ‘비극을 통한 화해’라는 극적인 결말이 이어진다. 로미오를 따라 자살하는 줄리엣과 달리 토니를 안은 마리아가 이민자 간의 무의미한 싸움을 그만둘 것을 호소하는 장면이 백미다.

지금도 이 작품은 세계 곳곳에서 관객들을 울린다. 60년 전 미국 사회의 그늘에서 건져 올린 사랑과 화해라는 근본 주제도 여전히 빛난다. 그날의 비련(悲戀)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국의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 반(反)이민 정책은 현재진행형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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