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경엔 품위 있게 살고픈 중년층이 있다
중요한 건 멋진 정장이 아니라 '기사도 정신'
이주은 <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
영화 ‘킹스맨2’가 추석 연휴 황금기를 겨냥해 예매율 1, 2위를 다투고 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대사와 함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의 멋을 원 없이 보여준 영국의 중년배우 콜린 퍼스. 그는 ‘킹스맨1’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후 한국에서 엄청 유명해졌고, 젊은 미남을 다 제치고 최고 매력남으로 회자됐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 퍼스가 들고나온 지극히 평범한 검은 긴 우산은 한때 멋쟁이 패션 소품이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폭발적인 인기를 의식한 퍼스는 이번에 새 영화 홍보를 위해 잠시 내한했고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갔다.
퍼스는 주로 차분한 영국 신사 캐릭터 역할을 맡아왔는데, 이 배우의 매력은 사실 갑작스럽게 발견된 게 아니다. 한국에 이미 소개된 로맨틱코미디 영화에서도 그는 첫눈에 반하기 쉬운 바람둥이 영국 남자 휴 그랜트와 비교되는, 진정성 있는 남자의 연기로 은근한 인기를 끌었다. 궁금한 것은 왜 한국에서 이 영국 신사 열풍이 일었던가 하는 점이다.
어떤 유행 현상을 제대로 얘기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퍼스로 대표되는 ‘영국 신사 신드롬’의 배후에는 신사가 되고 싶은 한국의 중년들이 보인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중년으로 산다는 것, 오십을 훌쩍 넘었어도 폼이 무너지지 않고 나이에 어울리는 매력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 너나 할 것 없이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슈트를 잘 소화해내는 ‘꽃중년’도 좋지만 정말로 중년 남자가 멋지다고 느끼는 순간은 몸에 배어 있는 매너에 있다. 매너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외적으로 드러난 태도인데 그 결과로 돋보이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당사자의 품위다. 좋은 매너를 보면 그 사람의 높은 도덕적 경지와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를 짐작하게 된다.
문명사에서 말하는 매너의 핵심은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유래했다는 점이다. 사회가 약육강식의 섭리로 돌아가는 것을 막고 인간이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하며 공존하기 위해 요구됐던 마음자세이자 태도가 바로 매너다. 영국에서는 아주 오래전 기사도정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사는 명예를 위해 싸울 때에는 결코 비겁하게 물러나지 않으며 강인한 힘을 갖도록 스스로를 훈련하지만, 결코 그 힘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도록 배운다. 오직 정의를 위해서만 그리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칼을 휘두른다. 그러니까 매너는 약자의 미덕이 아니라 강자의 미덕이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가 주인의식을 지니고 사회에서 엘리트로 살아가기 위한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집안에 자녀를 혼인시키기 위해서라도 매너 교육이 필요했다. 결혼을 원치 않는 처자라면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말괄량이 짓거리를 해대면 결혼성사를 망쳐 놓을 수 있었다. 남녀가 같은 통혼권 내에 있다는 것은 교양의 정도가 비슷하다는 것이었고, 이는 남녀의 매너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국의 기사도는 근대에 와서는 신사도로 이어진다. 원래 신사, 즉 젠틀맨은 18세기 무렵까지는 혈통 좋은 가문에서 자라난 차남 이하의 남자를 의미했다. 장남만이 귀족의 신분을 상속받았고 차남 이하는 독립해 전문 직업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들을 젠틀맨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는 출신가문에 상관없이 그 사람의 교양 및 도덕적 수준이 젠틀맨의 여부를 결정했다. 젠틀맨이 되는 길은 사실상 누구에게나 열린 셈이었고 매너가 바로 고귀함과 천함을 구분하는 비공식 잣대가 됐다는 뜻이다. 제아무리 가진 게 많은 부자라거나 지식이 드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돈과 권위를 내세우며 아랫사람에게 막 대하고 약자를 하대하면 어느 누구도 그를 젠틀맨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예외 없이 천한 사람으로 분류됐다.
엘리트 중년이라면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섰을 것이다. 이제 위만 보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며 사회적 약자에게 마음 쓸 일이 전보다 훨씬 늘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정장을 폼 나게 입는다고 모두 꽃중년은 아니지 않은가.
이주은 <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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