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어쩌나. 벌써 몇 달째 월사금을 못 냈는데….” 휘문고보 1학년 정지용의 걱정이 깊어졌다. 고향 옥천에서 간간이 오던 돈이 끊겨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됐으니 앞길이 막막했다. 한때 한약상을 경영한 아버지는 홍수로 집과 재산을 다 잃은 뒤였다. 그 전에도 옥천보통학교 4년을 다닌 게 학업의 전부였다. 한숨짓는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한 친척이 은행에 급사로 취직시켜줬다.
한 달 후 정신이 번쩍 났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 신세가 아주 가루가 나겠어.” 그는 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놨다. 깜짝 놀란 선생님은 그를 데리고 이사장실로 가 학적부를 펼쳐보였다. 그의 성적은 1학년 88명 중 1등이었다. 이사장은 “이렇게 우수한 아이가 돈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게 할 수 없다”며 교비생(校費生·장학생)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줬다.
돈 없어 그만뒀다 장학생 복귀
극적으로 복학한 정지용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문예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그런 지용을 교사들과 학생들 모두 좋아했다. 그는 학우들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발간하며 시를 썼다. 이때 발표한 시가 훗날 《정지용 시집》 3부에 수록된 동시 작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2학년 때는 《3인》이라는 소설도 발표했다. 학생회와 동문회 연합 모임인 ‘문우회’ 학예부장이 돼 교지 《휘문》을 창간했다. 여기에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인도의 타고르 시 ‘기탄잘리’ 1~9장을 번역해 실었다. 다른 번역물도 2편 실었다. 고교생으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3년 선배인 홍사용, 2년 선배인 박종화, 1년 선배 김윤식, 1년 후배 이태준 같은 문우들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렇다고 문약한 책상물림만은 아니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동맹휴학 사태를 주동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선배들의 중재로 구제돼 간신히 졸업한 그는 인사차 들렀다가 이사장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교비생 자격이었다.
교비로 日 유학 후 모교에 보은
일본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에서 6년간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휘문고에서 17년 동안 후배들을 가르치며 모교에 보답했다.
영어과 교사로 일한 시기는 그에게 제2의 휘문 시대였다. 이 무렵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그의 시 ‘고향’처럼 암울한 때였다. 그런 시대의 아픔 속에서 그는 후학을 가르치는 틈틈이 창작에 몰두했다. 첫 시집 《정지용 시집》과 둘째 시집 《백록담》을 출간하고,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청록파를 문단에 추천한 것도 휘문고 교사 시절이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그는 학생으로 5년, 교사로 17년 등 22년을 휘문고와 함께했다.
당시 휘문고는 서울 계동 현대건설 사옥 자리에 있었다. 학교 이름 아름다울 휘(徽), 글월 문(文)은 고종이 1906년 하사한 ‘휘문의숙’에서 땄다. 설립자는 구한말 중추원 의장과 육군부장을 지낸 민영휘. 지금의 대치동으로 이전한 것은 1978년이었다. 정부의 강남 이전 정책에 따라 민병유 전 이사장의 사유지로 옮겨왔다.
휘문고 교정 잔디밭에 있는 정지용 시비에는 그가 26세에 쓴 시 ‘향수’가 새겨져 있다. 뛰어난 언어조탁으로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모더니스트 시인, 한국을 대표하는 시의 성좌(星座)로 지칭되는 그의 일생은 대부분 휘문의 역사와 겹쳐 있다. ‘아름다운 글을 빛나게 하라’는 휘문의 학교 이름이 그냥 나온 게 아닌 모양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