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연휴 초입에 비가 내린다. 지금쯤 모두 고향에 닿았을까.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상념에 젖는다. 도심의 가로수 잎도 빗방울에 젖는다. 박재삼 시인은 ‘비 듣는 가을 나무’라는 시에서 ‘슬픔 많은 우리의 마음의 키들이/ 비로소 가지런해지는고나’라고 노래했다. 이 비 끝으로 가을이 금방 붉어올 텐데, 멀리 가지는 못해도 도심 숲길로 산책을 나서보자.
인왕산 자락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이 고즈넉하다.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배경이 된 곳으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숲속 길이 정겹게 굽이지고, 정자와 바위 사이로는 물길이 맑게 흐른다. 사직단 입구에서 수성동 계곡을 거쳐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까지 3.2㎞ 거리에 1시간30분이면 충분하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세검정 계곡숲길이 나온다. 홍제천 상류 세검정에서 숲이 울창한 백사실 계곡과 북악산 오솔길로 연결되는 코스다. 세검정 안내판에서 정선의 부채 그림 ‘세검정’도 만날 수 있다. 인근 북악 스카이웨이의 북악하늘길과 팔각정을 연결하는 산책로도 멋지다. 경복궁 서쪽으로 국립고궁박물관을 끼고 도는 효자로와 경복궁 동쪽의 삼청로~삼청공원,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돈화문로 또한 좋다.
노란 은행잎이 깔린 정동길은 전통의 데이트 명소다. 캐나다대사관 앞 550년 된 회화나무를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면 색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서대문구 안산도시자연공원에는 잣나무숲길과 숲속무대메타길이 펼쳐지고, 강북구 솔밭근린공원과 북한산 둘레길에는 소나무숲이 무성하다. 동대문구 배봉산공원 황톳길에서는 신발을 벗고 맨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변 서초구 길마중길은 굵은 모래를 깔아 한 멋을 더한다.
관악구 관악로의 자작나무 가로수길과 강남구 대모산 둘레길, 서초구 양재천 영동1교와 2교 사이 ‘연인의 길’도 운치 있다. 하늘 높이 솟은 메타세쿼이아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곳도 많다. 서울숲과 상암 월드컵공원, 강서둘레길 2코스의 서남환경공원, 서초구 태봉로의 메타세쿼이아 산책로가 인기다. 홍익대 인근 경의선 철길과 공릉동의 경춘선 숲길공원에서도 도심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남산공원 순환로를 따라 활엽수와 상록수의 가을 정취를 느끼고 N서울타워에서 멋진 야경을 볼 수 있다. 남산도서관 옆 소월시비에 새겨진 ‘산유화’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호젓하게 남산길을 걸어보자. 이런 날 도심 숲에서 듣는 릴케의 가을 노래도 의미 있다. 가을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더욱 그렇다.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베풀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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