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가의 작품 총평
기억의 불완전성을 소재로 '인간'이란 종(種)의 의미에 천착
카프카·오스틴·프루스트 작품 특징 고루 담겨
“현존 작가 가운데 가장 품위 있고 진지한 인물.”(이남호 고려대 교수)
가즈오 이시구로(63)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받을 만한 작가에게 돌아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만큼 그는 현대 영미문학의 표본과 같은 작가로 손꼽힌다. 30여 년 작가 생활 중 단 8편의 작품을 내놨다. 모두 국내에 소개됐다. 김남주 번역가는 이 가운데 5편의 소설을 번역했다. 국내에서 이시구로의 작품 세계를 가장 깊이 있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김 번역가로부터 이시구로의 문학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2017년 노벨문학상은 순(純)문학적 진정성을 품고 자기 쇄신을 거듭하는, 문학의 본령에 가장 충실한 작가에게 돌아갔다. 제인 오스틴의 시대적 사실성과 심리적 통찰, 프란츠 카프카의 환상과 사실이 만들어내는 꿈 같은 현실성, 사실보다는 사실에 대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해석.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거장들의 특징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소설의 위대한 정서적 힘을 통해 인간이 세계와 닿아 있다는 우리의 환상 아래 묻힌 심연을 발굴해온 작가”로 평했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이시구로는 5세 때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해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해온 일본계 영국 작가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보편성에 기초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인간이라는 종(種)의 의미에 치열하게 천착한다. 처음 만나지만, 이미 내 안에 있었던 듯한 익숙한 슬픔을 무겁지 않고 진하지 않은 언어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켄트대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이스트앵글리아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한 뒤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기도 했다.
이시구로는 30여 년의 작가 생활 동안 8편이라는 많지 않은, 그러나 중요한 작품을 발표했다.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전쟁의 상처를 다룬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으로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받았다. 이어 20세기 초 격동의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펴냈다. ‘고아의 운명’을 품은 이들이 세상과 대면하는 방식을 담았다. 어쩌면 작가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추리기법으로 쓰여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마음을 죄어들게 한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일본적 유산을 저변에 깔면서 영어 산문의 미묘함과 아름다움을 포착해낸 수작이다. 1989년 발표된 남아 있는 나날은 그에게 부커상과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줬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서는 환상과 사실이 교차하고 경험 세계와 정신 세계가 뒤섞이는 카프카적 실험 정신이 돋보인다. 2005년 발표된 나를 보내지 마는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아프게 묻는, 이제까지 발표된 이시구로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라고 봐도 좋은 소설이다. 영국 일간 더타임 선정 2005년 최고의 소설, ‘현대 100대 영문소설’에 뽑혔다. 여섯 권의 장편 소설에 이어 처음으로 나온 소설집 녹턴에 담긴 음악과 황혼에 관한 다섯 가지 이야기는 질감이 거의 두드러지지 않는 문장과 의도적인 단순한 구성을 통해 우리 삶을 그대로 펼쳐 보인다. 최근작 파묻힌 거인은 역사에서 사라진 켈트족 이야기다. 망각의 안개가 내린 고대 잉글랜드 평원을 무대로 기억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이시구로의 주인공들은 회고담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면서 기억의 불완전성을 십분 활용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의 에츠코,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오노,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뱅크스, 남아 있는 나날의 스티븐스, 나를 보내지 마의 케이시 모두 그런 어조로 우리에게 말한다. 영국 출신 평론가 브라이언 피니는 이를 두고 “기억의 불확실성을 오히려 활용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저자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심리적 동의를 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시구로 글쓰기의 특징은 기억이 사실을 감추는, 혹은 언어가 의미를 감추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며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집단적·개인적 과거는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 묻는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서 1·2차 세계대전이 주된 소재라고 창백한 언덕 풍경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을 역사소설이라 부를 수 없으며, 탐정이 미스터리를 파헤친다고 해서 우리가 고아였을 때가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대체현실을 다루고 있다 해도 나를 보내지 마는 공상과학(SF) 소설이 아니다.
이시구로는 장르나 소재를 넘어서서 자신의 관심이 다만 ‘인간’에 있다고, 문학의 기능은 ‘내면의 진화’에 있다고 행간에서 말한다. 우리에게 아직 삶을 제대로 세울 시간이 남아 있음을 환기해주는, 문학의 본령에 다가선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김남주 번역가 njh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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