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재발견] (3) 내게 건네는 한줄의 위로…짙어지는 만년필의 매력

입력 2017-10-23 07:30   수정 2017-10-24 17:44


#. 00대학교 사회과학대 301호 강의실. 2학년 김지은 씨는 노트북과 전공책만 들고 수업을 듣는다. 전공책을 펴놨지만, 필기는 따로 하지 않는다. 강의 내용은 노트북을 이용해 바로 필기한다. 나중에 도서관에서 필기내용을 한꺼번에 출력해 기말고사를 준비할 계획이다. 집에 돌아와선 만년필로 '어느덧 가을이 지고있다'고 끄적이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노트북·핸드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이 손의 고유영역이었던 필기를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손글씨를 완벽하게 대신하진 못했다. '쓰는 맛'이라는 고유 영역을 지켜가며 만년필을 비롯한 펜 시장은 성장하고 있다.

23일 옥션에 따르면 올해 1~9월 드로잉 용품 판매는 지난해보다 25% 늘었다. 캘리그라피(손글씨) 펜 판매도 21% 증가했다.

이처럼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가는 펜 시장은 만년필이 주도하고 있다. 졸업이나 취업 등 특별한 날에만 사는 선물용에서 벗어나 일상을 파고든 덕분이다.

◆중국산 만년필 늘자 '가성비' 갖춰…"선물용에서 취미용품으로"

만년필 시장은 독일, 프랑스 등 수입 브랜드가 주를 이루고 있다. 2012년부터 수입량은 5년째 증가 추세다. 2012년 29톤, 2013년 37톤, 2014년 48.9톤, 2015년 56.3톤으로 늘어났고, 지난해엔 78톤에 달했다. 올해 1~9월간 만년필 수입량도 57.4톤으로 집계돼 연말까지 수입량은 작년 수준을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선 만년필이 선물용에서 대중화 바람을 타면서 인기가 확산됐다고 진단한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이 높은 제품이 늘어나면서 부담없이 만년필을 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가성비 만년필을 주도한 건 중국산 만년필이었다. 2011년 중국의 국내 만년필 수입 비중은 22.7%였지만 2년 만에 35.8%로 10%포인트 넘게 증가했다.

그러자 국내 브랜드도 움직였다. 2012년 모닝글로리는 국내 업체로는 처음 캘리그라피 펜을 내놓았다. 캘리그라피펜 5종을 4000원에 선보였다. 캘리캘리펜(3000원)이라는 만년필도 본격 판매된 시기다.

모나미는 2015년 만년필 제작 계획을 발표하면서 지난해 4월 10가지 색상 만년필 '올리카'를 처음 선보였다. 가격은 3000원. 올해 8월에도 리뉴얼한 올리카 만년필 라인을 내놓았다.

이밖에도 플래티넘 프레피(3000~4000원)나 파이롯트 에르고그립(1만 원)·쁘띠(5000원)도 2010년대 이후 본격 판매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1000원짜리 만년필도 등장했다. 다이소는 지난해 9월 1000원짜리 만년필을 내놓았다. 고가의 선물용 만년필이 아니라 초등학생까지 누구나 가격 부담 없이 쉽게 써볼 수 있는 제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만년필 파카를 국내에 유통하는 항소 마케팅팀 관계자는 "만년필 시장에 10만 원대 이하 제품들도 나오면서 젊은 층도 가볍게 쓸 수 있는 제품이 됐다"며 "파카도 20만 원대 제품이 주력이지만 리뉴얼을 통해 제품 라인을 다양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만의 펜' 만년필로 나만의 작품 써볼까

그럼 취미나 일상용품으로 자리잡은 만년필엔 어떤 매력이 있을까. 펜촉이 종이에 닿으며 나는 소리와 '느림의 미학'이 있다고 애용가들은 입을 모았다.

5년간 만년필을 사용 중인 30대 송재형 씨는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고 일반적 펜과는 다른 필기감이 매력 요소"라며 "만년필로 잘 쓰려면 천천히 써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구를 음미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밝혔다.

또 만년필은 브랜드마다 펜촉이 달라 여러 브랜드를 모으게 된다. 그는 "만년필 제조사마다 펜촉의 특성이 달라 갖고 있는 필기감이 서로 다르다는 게 매력적"이라며 "만년필 한 개를 사서 쓰다 보니 자주 쓰는 만년필이 5개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덧붙였다.

쓰는 사람에 따라 펜촉이 달라지면서 '나만의 펜'이 된다는 점도 매력적인 요소로 꼽았다. 공산품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애장품으로 변신한다는 것.

이에 사무용품 브랜드도 '나만의 펜'을 만들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모나미는 에버랜드와 동대문디지털플라자(DDP) 2곳의 콘셉트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1963년 출시한 153펜을 DIY(DO it Yourself)로 나만의 펜으로 만들고, 올리카 등 만년필 펜도 써볼 수 있는 공간이다. 153라인은 검정과 흰색으로 된 모나미가 처음 생산한 볼펜이다.

모나미 관계자는 "주말엔 부모와 아이들이 펜을 조립해 보기 위해 동대문점을 찾는다"며 "153펜이 생소한 10~20대들을 겨냥하기 위해 키스데이 등 시즌에 맞춘 제품도 내놓고 있다"고 밝혔다.

한정판 마케팅도 전개하고 있다. 2014년 리미티드 프리미엄 볼펜 1만 개를 2만 원에 선보였다. 현재 인터넷 중고카페에서 10만 원에 판매된다. 올해 3만 개 한정으로 출시된 153골드(5만 원)는 출시 두 달 만에 1만6000개가 팔려나갔다.
◆보이는 문학으로 자리잡은 '필사책'

만년필 시장과 함께 필사책도 특수를 누리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올해 1~9월간 필사책 판매는 전년 동기보다 531% 급증했다.

필사책 열풍엔 tvN 드라마 '도깨비'도 한 몫을 했다. 드라마엔 김용택 시인의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라는 필사책이 등장했다. 극중 지은탁(김고은 분)이 시를 따라 쓰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는 올해 예스24에서 4만4000권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문학 카테고리의 필사책 중 가장 많이 팔린 것이다.

'읽는 문학'에서 '보이는 문학'으로 옮겨가면서 필사 열풍이 이어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캘리그라피와 필사책은 이미 SNS(사회관계망서비스)상에서 취미로 자리 매김했다. 지난 18일 기준 인스타그램에서 '#캘리그라피'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170만 개 이상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어쩌다 내 이름을 불러준 그 목소리를, 나는 문득 사랑하였다.' 등과 같은 시구나 소설 등 문학작품을 필사한 게시물을 쉽게 볼 수 있다.

김도훈 예스24 문학MD(상품기획자)는 "사람들이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문장을 직접 필사해 힐링의 도구로 삼고 있다"며 "이를 SNS에서 공유하면서 필사책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밝혔다.

고은빛 한경닷컴 기자 silverligh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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