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숙의(熟議)는 국회에서 이뤄져야

입력 2017-10-26 18:14  

아테네 민주정치가 중우(衆愚)정치로 타락했듯이
모든 직접민주주의는 선동정치 위험 높아
숙의가 필요하다면 국민이 뽑은 의원이 해야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바른사회 공동대표 >



문재인 대통령의 탈(脫)원전 선언과 뒤이은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의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결정으로 빚어진 논란은 결국 공론화위원회의 공사 재개 권고로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거의 모든 언론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이 ‘숙의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의 성공적인 첫 실험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문 대통령 또한 공론화 방법을 두고 ‘새로운 갈등 해결 모델’ ‘역사적 첫걸음’ 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민참여단에 대해서는 ‘471인의 현자(賢者)’ ‘작은 대한민국’이란 평가를 내렸다. 생소한 숙의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한순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만트라(mantra·진언)로 등장한 것이다.

숙의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생각해 넉넉히 의논함’이다. 숙의민주주의란 그런 숙의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형식이다. 제임스 피시킨 등 소수의 외국 정치학자들이 주장하는 ‘deliberative democracy’의 번역어다. 우리 정치학계 일각에서도 이를 차용해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사회적 쟁점에 대해 하나의 대안적인 해결 방안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한 보완책에 불과했던 숙의민주주의는 이제 직접민주주의, 참여형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이미 제주도에서는 ‘쟁점 사안은 숙의에 회부한다’는 조례가 발의됐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 행정에서 숙의민주주의를 일상적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숙의를 활용하더라도 민주적이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숙의민주주의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대표성과 정당성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숙의의 절차에 대한 광범한 사전 합의가 있어야 한다.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민주주의의 요체가 “결정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동의”라고 설파한다. 이 동의의 전제는 당연히 정당한 절차다.

일단 쟁점이 불거지면 이미 입장이 갈리기 때문에 절차에 대한 합의는 쟁점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존 롤스의 표현을 빌리면 ‘무지의 장막(the veil of ignorance)’ 뒤에서 미리 이뤄져야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투표(ballot)가 총알(bullet)을 대체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전에 절차가 정해지고, 그 절차에 따른 결과를 수용한다는 합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숙의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숙의의 대상이 되는 쟁점은 물론이고 대상 쟁점에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숙의 절차에 대한 합의가 있고, 이 절차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당사자들이 이를 수용하기로 할 때만 의미가 있다. 이번 공론화 과정에서도 나타났듯이 숙의는 당초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한쪽의 주장을 지지하게 함으로써 의견을 양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합의할 절차 가운데는 당연히 숙의에 참여하는 시민의 범위와 선택 방법도 포함돼야 한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이미 존재하는 마당에 새로운 시민 대표를 뽑아 숙의하려면 이들이 모집단인 시민 전체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숙의민주주의는 시험해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지나친 생각이다. 숙의민주주의를 포함해 모든 형태의 직접민주주의는 선동정치 위험에 노출돼 있다. 관심도 없고 ‘합리적으로 무지한’ 사람을 끌어모으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민주주의 발상지인 고대 아테네가 그랬다. 페인트를 묻힌 줄을 피해, 자신의 의사에 반해 아크로폴리스에 나온 시민은 결국에는 민주정치를 중우정치로 타락시켰다. 조지프 슘페터가 유권자는 투표만 하고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관을 밝힌 것도, 비제도화된 참여의 폭발로 많은 혼란을 경험한 프랑스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그 주권은 국민의 대표를 통해서만 행사된다고 헌법에 못 박은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가 일정 규모 이상의 정체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차악의 제도가 아니다. 그 자체로 장점이 있는 제도다. 숙의가 필요하다면 정당한 절차에 의해 선출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바른사회 공동대표 yjlee@kh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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