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 '감성 여행'
19세기 올드타운 파이어니어 스퀘어…21세기 우주선 전망대 스페이스 니들
발길 닿는 곳마다 개성이 살아 숨쉰다
시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 '머천트 카페'
가장 핫한 커피숍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1917년 완공한 '치튼던 수문'과 '피시 래더'
예술가의 마을에 있는 괴상한 조각상 '트롤'
생동감 넘치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진~한 커피향이 흐르는 캐피털 힐
승무원이 돼 미국을 갔을 때 가장 먼저 만난 곳은 시애틀이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속에서 본 시애틀은 한없이 낭만적이었지만 실제로 경험한 그곳은 놀랍게도 너무나 변화무쌍했다. 고층 빌딩 숲 사이로 새하얀 만년설로 뒤덮인 산이 보이는가 하면, 항구 도시의 생동감이 넘치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건물로 가득한 고풍스러운 거리가 나온다. 빠르게 변화하는 다른 대도시와 달리 곳곳에 여유가 넘친다.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곳. 그곳이 바로 시애틀이다.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활보하며 시애틀을 경험하고 느껴보자. 무엇이 이곳을 이토록 특별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파이어니어 스퀘어
시애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다운타운에서도 올드타운으로 불리는 파이어니어 스퀘어로 가야 한다. 19세기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과 유서 깊은 상점들이 시애틀에서 제일 처음 개척된 곳이다. 1914년 지어진 스미스 타워에는 아직도 수동 엘리베이터가 전망대를 오가고 있고, 시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인 머천트 카페 (Merchant’s Cafe) 이곳 파이어니어 스퀘어에 자리잡고 있다.가을에는 이 중후한 건물들 사이로 울긋불긋한 단풍 물결이 넘실대고, 시애틀에서 가장 낭만적인 거리로 변신한다.
파이어니어 스퀘어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처음 시애틀이 개척되던 19세기 후반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지대가 낮고 하수도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파이어니어 스퀘어는 상습적인 침수와 반복되는 하수 처리 문제로 큰 불편을 겪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9년 발생한 대화재는 이곳을 완전히 변모시켰다. 도시를 재건하면서 도로와 건물을 원래보다 3m가량 높이 지었고, 땅 밑 공간에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났다. 흡사 지하도시처럼 변모한 파이어니어 스퀘어는 악취 가득한 예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 비밀스러운 모습은 언더그라운드 투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파이어니어 스퀘어에는 파이어니어 플레이스라 불리는 작은 광장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18m 높이의 토템 기둥과 인디언 추장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 인디언 추장의 이름이 바로 시애틀이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이민자가 늘어나자 1852년 미국의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인디언의 땅이던 이곳을 미국에 팔 것을 요구했다. 미국 정부의 일방적인 요구에 시애틀 추장은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정말 이상하다. 어떻게 하늘과 대지의 따스함을 사고판다는 말인가?”라고 물으며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 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한 존재라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결국 이 땅은 미국 정부에 복속됐지만, 시애틀 추장의 편지에 감동한 피어스 대통령은 그의 이름을 도시명으로 하여 후대에도 기억될 수 있게 했다. 성스러운 땅을 이방인에게 내준 시애틀 추장은 굳게 다문 입술의 흉상이 되어 파이어니어 광장에서 자신이 살던 땅을 바라보고 있다.
시애틀의 상징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과 스페이스 니들
파이어니어 스퀘어에서 퍼스트 애비뉴(1st Ave)를 따라 걷다 보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인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 보인다. 1907년 어시장(魚市場)에서 출발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이제는 한 해 10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모여드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시장이 됐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날아다니는 물고기로 유명한 ‘파이크 플레이스 피시마켓’이 있다. 생선을 공중으로 던져서 옮기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구경꾼 사이로 항구도시답게 갓 잡아 올린 연어, 게, 조개 등 다양한 해산물이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그 싱싱한 자태는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정도다. 오죽하면 일부 생선가게에는 ‘만지면 사야 한다(You touch, You buy)’는 경고문까지 붙여 놓았을 정도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형형색색의 채소와 과일을 판매하는 상점이 많다. 시애틀이 속한 워싱턴주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농산물 산지라 항상 제철 과일과 채소로 가득하다. 계단을 따라 비밀스럽게 이어진 지하에는 마치 한 시대를 뛰어넘은 듯 100년의 시간이 담긴 재미난 상점이 많다. 뽀얀 먼지가 덮인 골동품, 오래된 책, 요상한 마술용품과 만화에서 나올 법한 알록달록한 막대사탕 등이 우리를 유혹한다. 이곳에선 사탕가게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시애틀의 또 다른 상징은 이름부터 독특한 스페이스 니들. 미국 여느 대도시 모습과 다를 게 없을 것 같은 시애틀의 다운타운이 이토록 개성있게 보이는 것은 바로 스페이스 니들 덕분이다. 184m의 길게 뻗은 바늘 기둥 위에 얹혀진 우주선이라니! 비행을 하며 나름 유명한 전망대를 많이 올라봤지만 이런 모습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스페이스 니들이 유명한 것은 독특한 외형 때문이기도 하지만 22달러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전망 덕분이다. 에메랄드 시티라 불리는 시애틀의 멋진 자연경관을 360도로 돌아가며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에서는 시애틀을 둘러싼 항구와 워싱턴 호수, 다운타운은 물론 날씨가 좋을 때는 만년설의 레이니어 산까지 보인다. 시애틀의 상징인 스페이스 니들까지 담고 싶다면 케리 파크나 알카이 비치에서 온전하게 시애틀 전경을 만끽할 수 있다.
커피의 도시 시애틀, 커피의 성지 캐피털 힐
시애틀의 또 다른 명물은 커피다. 인구 60만 명인 도시에 등록된 카페만 1만 개가 넘는다. 사실 시애틀은 커피의 도시이기 이전에 보잉,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코스트코 등 세계적인 기업의 본사가 있는 워싱턴주 최고의 경제도시다. 미국에서 평균 연봉이 가장 높기로 유명한 이 경제도시에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커피 브레이크 시간이다. 게다가 ‘비의 도시’라 불릴 만큼 자주 흩날리는 비와 흐린 날씨는 자꾸만 커피를 떠올리게 한다.
스텀프타운 로스터스, 에스프레소 비바체, 빅트롤라 커피 로스터스 등 명성 높은 독립 카페가 많이 모여 있는 캐피털 힐은 시애틀에서도 ‘커피의 성지’로 꼽힌다.
요즘 캐피털 힐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2014년 문을 연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앤드 테이스팅 룸이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건너편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과 함께 커피 마니아들의 필수코스인 이 독특한 공간은 스타벅스 최고경영자(CEO)인 하워드 슐츠가 10년의 긴 시간을 들여 구상해 만들었다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커피 공장에 온 듯 원두를 볶고 커피를 내리며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신기한 기계들이 가득하다. 직원의 설명과 함께 매장을 둘러보고, 커피 익스피리언스 바에서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를 맛보며 다양한 방법으로 커피를 경험해볼 수 있다.
커피 향 가득한 캐피털 힐을 걷다 보면 시애틀 사람들의 자유로운 개성이 담긴 그들의 아지트를 만날 수 있다. 1973년 파이어니어 스퀘어에 문을 연 유서 깊은 서점인 ‘더 엘리엇 베이 북 컴퍼니’는 2010년 캐피털 힐로 옮겨 여전히 시애틀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서점 안은 삼나무 책장에 보관된 15만 권의 도서가 빼곡한데, 섹션별로 잘 정리된 책장 곳곳에는 하얀 쪽지가 붙어 있다. 손글씨로 적혀 있는 이 쪽지들은 모두 서점 직원들이 직접 쓴 일종의 추천사다. 다정하게 써 내려간 추천사를 보며 각자의 방법으로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책 한 권을 고르게 된다.
시애틀 북부 치튼던 수문과 피시 래더
산과 바다, 호수, 강으로 둘러싸인 시애틀은 다운타운에서 차를 타고 조금만 벗어나도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차를 타고 북쪽으로 30여분을 달려 발라드 록스 지역으로 가면 독특한 볼거리인 ‘치튼던 수문과 피시 래더’가 있다. 1917년 완공된 치튼던 수문은 시애틀의 주요 해협 퓨젯 사운드와 유니언 호수, 워싱턴 호수를 연결하는 워싱턴 운하(ship canal)에 있는 수문이다.
워싱턴 호수와 유니언 호수는 퓨젯 사운드보다 해수면이 6m 이상 높은데 치튼던 수문은 이곳을 통과하는 배들을 위해 물의 높이를 조절한다. 한쪽 수문이 열리고 배들이 들어오면 수문을 닫고 물을 채워 수위를 높인다. 수위가 같아지면 반대쪽 수문을 열어 배들을 내보낸다. 퓨젯 사운드로 나갈 배들이 들어오면 다시 수문을 닫아 물을 빼서 수위를 낮추는 방식으로 배들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치튼던이라는 특이한 이름은 수문 설계자인 하이엄 M 치튼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곳의 또 다른 명물은 피시 래더. 피시 래더는 산란을 위해 수문과 댐을 거쳐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을 위해 만든 계단형 수로다. 한쪽 면이 유리벽으로 돼 있어 연어가 이동하는 진풍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진보적 분위기 물씬 나는 프리몬트
다운타운에서 유니언 호수를 건너 치튼던 수문으로 가는 길목에는 한적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동네가 있다. 이곳이 바로 프리몬트 인민 공화국 또는 프리몬트 예술인 공화국으로 불리는 프리몬트다. 보헤미안의 정취와 함께 미국에서도 가장 진보적이기로 유명한 프리몬트는 예술가들의 마을답게 거리 곳곳에서 예술작품이 불쑥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오로라 다리 아래 트롤은 괴상한 모습으로 유명한 조각상이다. 5m가 넘는 이 거대한 트롤 때문에 어두운 다리 밑이 음산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칫 위험 지역일 수도 있는 다리 밑이 구경꾼들 덕분에 가장 붐비는 곳이 됐다. 프리몬트 거리 중심에는 무게 7t이 넘는 커다란 레닌 동상이 있다. 공산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레닌이 미국 땅에 당당히 서 있다니! 잠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곳은 프리몬트. 프리몬트에서는 이 레닌 동상도 불길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일 뿐이다. 이 동상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 정권이 붕괴한 뒤 철거돼 고철 야적장에 있던 것을 미국인 루이스 카펜터가 발견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판매 중인 상품이라는 것이다. 동상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카펜터 가족들은 1995년부터 이 레닌 동상을 매물로 내놨지만 15만~30만달러로 감정만 받았을 뿐 팔리지 않고 있다. 이제는 프리몬트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만큼 이 동상이 팔리면 오히려 미국에서 레닌 동상 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나는 진풍경이 벌어지지 않을까?
레닌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프리몬트를 돌아보며 시애틀이 더 궁금해졌다. 10년 동안 오가며 이제는 시애틀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도시에는 너무나 다양한 가치관과 그들만의 문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도시를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이 시애틀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시애틀에서는 잠시 머무는 여행자들도 이방인이 아니다. 시애틀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그 안에 오롯이 스며들기만 하면 된다.
여행정보
아시아나항공은 인천~시애틀 구간을 매일 1회 운항한다.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에서 다운타운까지는 경전철(Link Light Rail)로 40분 정도 걸리고, 운임은 편도 기준 3달러로 저렴한 편이다. 시애틀의 인기 있는 투어로는 시애틀 대화재 후 도시를 재건하면서 묻혀진 지하공간을 둘러보는 언더그라운드 투어, 귀여운 오리가 그려진 수륙양용차를 타고 시애틀 주요 명소를 둘러보는 라이드 덕 투어, 보잉사 공장 내부를 둘러보며 항공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보잉사 투어, 시애틀 곳곳의 인기 음식점을 방문하며 대표 메뉴를 맛보는 세이버 시애틀 푸드 투어가 있다.
시애틀=글·사진 박혜령 선임승무원 hrparki99a@flyasi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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