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위기대응에 취약한 국가

입력 2017-10-29 17:32  

수출 호조이나 일자리 증가 등 실속 없어
노동개혁·구조조정 논의만 중단된 상태
'10년주기 경제위기' 되풀이하지 말아야

이인실 <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



해마다 요즘처럼 온도가 내려가고 날씨가 스산해지면 20년 전 악몽이 되살아난다. 1997년 11월21일 정부가 국가부도사태를 선언하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던 그날은 마치 국치일 같았다. 동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길거리로 나앉게 됐고 살아남은 자들도 좌불안석이었다. 경제전문가들도 위기를 전혀 예견 못했고, 미래에 대한 예측은커녕 현재 경제 현상에 대한 진단도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컸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외환위기 이야기를 하면 구석기 시대 수준의 이야기를 듣는 표정이다. 사실 그동안 강산이 두 번 변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외환위기 전후 경제 여건은 많이 변했다. 우선 구제금융 신청의 직접적 원인인 외환보유액이 지난 9월 말 현재 3848억달러나 되고,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1996년 230억달러에 달한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올해는 1000억달러 흑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주기 경제위기설이 다시 나도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돌이켜보면 10년을 간격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008년에도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있었으며, 그보다 10년 전에는 외환위기를 겪었고, 또 그보다 10년 전에는 민주화 욕구와 더불어 노사분규가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경제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0년 단위로 경제위기가 올 때마다 경제적 여건은 다르지만 국정혼란과 사회분열, 정치갈등 등 여러 정치·경제·사회 문제로 경제착시현상을 파악하지 못해 큰 대가를 치렀다. 1997년에는 엔고 호황과 반도체 특수로 우리 경제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과도하게 설비를 늘렸으며, 정치 논리에 기대어 한계기업 퇴출이 지연됐다. 경제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데 외형 성장에 도취돼 차입경영과 고비용구조를 고착화시키고 말았다. 2008년에도 선박 수출이 호황을 보이면서 총수출 구조적 둔화를 외면해 값비싼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최근 수출이 기록을 경신하면서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11개월간 증가세가 이어지더니 지난 9월 수출액은 551억3000만달러로, 무역통계를 작성한 1956년 이래 61년 만의 월간 사상최대액을 기록했다. 반도체·철강·자동차·석유화학 등 주요 주력 업종 수출도 9월 중 두 자릿수 이상 증가했다. 반도체를 제외해도 9월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29.3% 늘었다. 수출 지역도 선진국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인도, 중남미 등 신흥시장으로도 골고루 늘었다. 이는 우리의 수출경쟁력 향상보다는 미국을 필두로 세계 경기가 회복되고 있고, 특히 4차 산업혁명이 확산되면서 반도체와 정보통신 분야 신제품 수요가 늘고 있는 덕분이다. 한국은행과 IMF가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기존의 2.8%와 2.7%에서 모두 3.0%로 상향 조정했다.

하지만 오래된 필름이 돌아가듯이 이번에도 정치위기와 국정혼란이 계속되고 있고, 노동개혁이나 구조조정 얘기는 쑥 들어가 버렸다. 수출이 늘고 성장률 기대치가 상승하고 있지만 수출 호조가 투자와 소비를 견인해 일자리가 늘어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수출의 취업유발계수는 여전히 낮고 수입유발계수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수출 활황이 숫자만 커질 뿐이지 침체된 국내 경기에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는 실속이 없다는 이야기다. 마치 한국이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국가별 ICT 발전지수에서 2010년 이후 7년 동안 단 한 해를 빼고 1위를 유지했음에도 4차 산업혁명 준비 순위(스위스 UBS 보고서)는 139개 국가 중 25위에 불과한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최저임금 대폭 상향,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공공 부문 81만 개 일자리 정책, 소득주도 성장론, 통신요금 인하, 건강보험 비급여의 급진적 급여화 등 열심히 뭔가를 하고는 있는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위기설이 나올 때마다 공통점은 국내외 경제 환경이 급속히 변하고 있고 위기를 암시하는 사인이 있었음에도 적시에 정책적·제도적 대응을 할 수 있는 국가 기능이 극도로 취약했다는 점이다. 최근엔 여기에 북핵 위기와 중국 미국 등 강대국 횡포까지 덮칠 수 있다.

이인실 <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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