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기내식 라면

입력 2017-10-30 18:07  

한국인에게 간식 혹은 식사 대용 인스턴트 식품으로 라면만큼 인기 있는 음식도 드물다. 라면은 언제 어디서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을 정도다. 인생에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라면에 대한 추억을 대부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특별한 장소에서 먹는 라면은 왠지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추억은 각자 다르겠지만 라면의 효용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것은 춥고 배고플 때가 아닌가 싶다. 한겨울 장시간의 야외 활동 후 먹는 라면은 그야말로 꿀맛이 따로 없다. 면발도 그렇지만 따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 언 몸은 물론 마음까지 사르르 녹으며 세상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겨울 산행 후 또는 스키장에서 먹는 라면이 특별히 맛있는 건 그래서다. 혹한기 군대에서 먹던 라면 맛이 잊혀지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요즘엔 해외 여행이 보편화되면서 기내식 라면도 별미 중 하나로 꼽힌다. ‘하늘 위의 별찬’으로 인기를 끌면서 국내 항공사에 이어 외국 항공사 중에도 제공하는 곳이 늘고 있다고 한다. 기내식 진출 20년째를 맞은 농심은 올해 저가항공사를 포함, 국내 전 항공사에 라면을 공급하게 됐다고 어제 밝혔다. 농심 신라면을 기내식으로 내놓는 외국 항공사도 올해 처음 20곳을 넘겼다. 농심이 그동안 기내식으로 공급한 라면은 약 3000만 개로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의 연간 국제선 이용객 수와 비슷한 수준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내식 라면이 실제로는 육상에서보다 맛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이유는 뜻밖에도 85dB에 달하는 비행기 엔진 소음 때문이다.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올 때와 맞먹는 정도인데 이런 소음에서는 맛 신호를 혀와 침샘에 전달하는 안면신경 중 일부가 둔해진다고 한다. 그 결과 단맛과 짠맛을 느끼는 능력이 30%가량 떨어진다는 것이다. 라면을 포함, 다른 기내식도 실제 맛을 느끼기 어렵단 얘기다.

컵라면 외에 기내에서 끓여주는 라면의 경우엔 비행기 기종에 따라 더 맛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 에어버스의 A380은 기내 전력이 낮게 설계돼 물을 팔팔 끓이지 못하고 70~80도까지밖에 못 데우는데 이 온도로는 라면이 설익거나 불어터진다는 것이다. 몇 년 전 기내식 라면이 맛없다며 승무원을 폭행했다가 회사에서 해고된 이른바 ‘라면 상무’가 탄 기종도 A380이었다. 그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라면이 맛없다는 항의는 괜한 생트집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기내식 라면이 맛이 없다는 과학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기내에서 라면을 참 맛있게 먹었다고 기억한다. 시간 장소 불문, 라면을 사랑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여행의 설렘까지 겹쳤기 때문은 아닐까.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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