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미디어 뉴스룸-MONEY] 상상력 결정체 '신화(神話)'의 무한 진화

입력 2017-11-03 18:32  

# 신라시대 선덕여왕을 흠모한 지귀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평생 여왕을 한 번 만나보는 게 소원이었다. 절 앞에서 여왕을 기다렸는데 결국 만나지 못했다. 잠깐 조는 사이에 놓쳐버린 것이다. 선덕여왕은 팔찌 하나를 놓고 갔다. 지귀는 불귀신이 돼 버렸다.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심장에 불이 붙어 몸 전체가 탄 것이다.

# 최항은 부모의 반대에 상사병으로 죽었다. 죽어 혼이 된 최항은 여자를 찾아간다. 꽃 한 송이를 따서 자신의 머리에 꽂고 여자에게도 건네주며 꽃이 시들기 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아침이 되자 여자는 남자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을 열어보니 남자의 버선에 흙이 묻어 있고, 머리에는 꽃이 꽂혀 있다. 여자의 눈물에 남자는 다시 깨어나고, 둘은 30년을 해로하다 한날한시에 죽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우리 옛이야기, 신화들이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남성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남성들이 정 때문에 신이 되고, 사랑에 목숨을 건다. 심지어 죽었다 다시 깨어난다. 그 시대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죽은 남성의 모습을 상상한 것으로 볼 때 우리 신화 속 애정의 원천적 구조는 상당히 로맨틱하다.

그런 신화 속 지고지순한 남성상은 오늘날 문화 콘텐츠로 다시 돌아왔다. 사랑 때문에 죽었다 살아나고 신이 돼서 수백 년을 달려오는 애정의 원천적 구조가 TV 드라마 ‘도깨비’ ‘하백의 신부’ 등에서 재현되고 인기를 얻었다.

최근 문화 콘텐츠의 인기 소재인 저승사자의 흥행 코드는 친숙한 낯섦이다. 방영 중인 케이블TV OCN 드라마 ‘블랙’, 개봉 예정인 영화 ‘신과 함께’ 등에서 저승사자는 초월적인 능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적이다.

저승사자라는 초월적인 능력이 있으면서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친숙한 면모를 지닌 존재를 창조해냄으로써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해보려는 오래전 사람들의 정서가 원형을 유지한 채 시대에 따라 반복되며 재해석되고 있다. 과거의 신화가 오늘날의 시대적 갈망과 믿음을 반영하며 웹툰 게임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문화 콘텐츠이자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무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신화는 인류 상상력의 결정체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신화는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입을 거치며 살아남은 이야기의 원류에 해당한다. 거기엔 인류 보편의 철학과 정서, 세계관과 인간관이 담겨 있다.

조지프 캠벨은 신화를 ‘육체적 에너지로부터 부추김을 받은 상상력의 노래’라고 정의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에게 신화는 ‘창조의 보고서’다. 상상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야기와 이미지로 구현한 삶의 갈망이 곧 신화다.

그리고 이런 신화적 상상력의 방식은 바로 ‘접속’에 있다. 나 아닌 다른 존재와의 자유로운 접합, 접속, 변신이 상상력이 구현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신이 되고 동물이 될 수 있다는 상상, 두 개의 이질적 요소를 은유적 상상력으로 하나로 엮어내는 능력. A를 보고 A'를 상상하고 이야기와 이미지로 엮어내는 이런 신화적 하이브리드 상상력은 문화 콘텐츠를 뛰어넘어 제4차 산업혁명의 ‘융합의 시대’에 혁신 성장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

최근 문화 콘텐츠로 다시 돌아온 신화는 우리 옛이야기, 동양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다른 신화적 상상력을 소환한다. 융합과 교감에 강한 ‘새로운 상상력’으로서 동양 신화를 얘기하는 이유다.

이현주 한경 머니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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