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치솟는 소니, 제2 전성기 다시 오나
올 들어 소니 주가, 56% 급증한 까닭은
소니 주가는 14일 5,224엔에 마감했다. 올 1월4일 3,333엔(종가 기준)과 비교해 56.7% 급등했다. 11월 들어 소니 주가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내년 3월 말 끝나는 2017회계연도의 예상 영업이익을 6,300억 엔으로 상향 조정한 이후 주가가 치솟고 있다.
소니 측이 발표한 올 상반기 사업부문별 영업이익을 보면 모바일&커뮤니케션을 제외하곤 모든 사업부에서 골고루 흑자폭이 전년보다 늘어났다. 영화부문은 흑자로 전환됐고, 반도체부문도 2016년의 42억엔 적자에서 494억엔 흑자로 돌아섰다. 게임&네트워크 서비스부문의 흑자도 전년 동기 190억엔에서 548억엔으로 큰 폭 증가했다.
1950~90년대 초반까지 고도 성장기 일본의 전자산업을 이끌었던 ‘가전왕국’ 소니가 부활하고 있다. 세계 소비자들의 머릿 속에 ‘소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비롯해 TV, 워크맨,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 플레이스테이션, 디지털카메라 등의 명가로 각인돼 있다. 인터넷으로 ‘소니’를 검색하면, 첫 화면에 최신 전자제품이 뜬다.
하지만 주식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소니는 ‘전자제품 메이커’ 그 이상이다. 투자들에게 소니는 가전제품 대표 업체가 아닌 완전히 다른 ‘회사’이다. 소니의 미래 주가를 예측해 보려면 창업 이후 긴 변천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소니의 전신은 1945년 이부카 마사루(井深大)가 설립한 ‘도쿄통신연구소’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잿더미가 된 도쿄를 보면서 무언가 세상에 도움이되는 걸 해보자는 뜻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1946년 아사히신문에 도쿄통신연구소의 기사를 본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가 나고야에서 상경, 합류하면서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가 출범했다.
이부카와 모리타는 해군 기술중위로 전시과학기술연구회에서 서로 알고 지냈다. 1946년 5월 자본금 19만엔, 종업원 20명의 작은 회사가 설립됐다. 소니의 본격 출범이다. 문부대신이었던 장인 마에다 타몬이 사장, 이부카(38세)는 기술담당 전무, 모리타(25세)가 영업담당 상무로 취임했다.
1950년 이부카는 사장으로 취임했다. 국산 첫 테이프레코더 G-1형을 개발했으나 가격이 비싸(현재 300만엔 정도) 잘 팔리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소비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부카는 곧바로 저가소형 제품 개발에 착수, 성공했다. 전국의 초,중학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미군 점령하에 통제됐던 전파가 개방되면서 전국적으로 라디오방송국 개국붐이 불어 제품 수요가 급증했다.
1955년 트랜지스터의 국산화에 성공, 8월에 트랜지스터라디오 TR-55를 ‘SONY’ 이름으로 시판했다. ‘전자왕국’ 일본의 기초를 다진 제품이다. 1958년 상표였던 SONY를 정식 사명으로 바꿨다. ‘SONY’의 유래는 라틴어의 소리를 의미하는 ‘SONUS’와 작다 또는 소년이란 의미의 ‘SONNY’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글로벌 전략 차원에서 세계에서 통용이 되는 회사명으로 지었다.
1971년 모리타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회사는 황금기를 맞았다. 베타막스 비디오 레코더, 워크맨 등의 성공에 힘입어 대기업의 대열에 진입했다. 1978년에 총자산 6,189억엔, 이익잉여금 1,829억엔에 달할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했다.
1982년 오오카 노리오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소니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오오카 사장은 성악가에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도 유명했다. CD플레이어, 핸디컴 등 호재도 있었지만, 사운을 걸고 업계 표준으로 만들려던 베타막스 비디오 레코더 플레이어가 파나소닉 진영의 VHS와의 싸움에서 패해 타격을 입었다. 1983년에 소니는 창업 이후 처음으로 매출액이 전년 대비 마이너스 성장했고, 영업이익도 37% 감소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소니는 1988년에 CBS레코드사를 2,700억엔에, 1989년에 콜롬비아영화사를 6,120억엔에 사들인다. 이들 기업 인수(M&A)는 소니의 재무구조를 크게 바꿨다. 1994년에는 콜롬비아에의 투자분 2,650억엔을 일괄 상각을 할 수밖에 없어 연결결산으로 첫 영업손실을 내기도 했다.
영화사 인수를 계기로 소니는 종합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1995년 사장으로 취임한 이데 노부유끼는 ‘탈 전기전자업체’를 선언했다. 1996년에 소니보험을 100% 자회사로 만들고, 2001년에는 소니은행을 설립하는 등 금융사업을 확대했다.
2000년대 들어 소니의 자산은 12조엔을 넘게 된다. 금융사업의 보험과 은행비지니스부분이 자산과 부채에 새로 더해져 재무구조가 또한번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소니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VAIO PC 등 히트상품을 내기도 했으나 사업부별로 영업손실을 내기도 했다.
특히 전기사업 부분이 부진했다. 2003년 1분기에는 시장의 예상을 넘는 큰 폭의 적자 결산을 내면서 주식시장에 ‘소니쇼크’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매년 인원 삭감과 공장 폐쇄 등 구조개혁을 단행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1년에는 4,567억엔의 사상 최대 적자를 낸 뒤 2012년에 히라이 카즈오가 신임 사장으로 취임했다.
히라이 사장은 전기사업의 부활을 내걸고 구조개혁을 실시, 2015년에 전기사업부분의 흑자를 달성했다. 소니 사업부는 모바일&커뮤니케이션, 게임&네트워크서비스, 이미징 프로덕트& 솔루션, 홈엔터테이먼트& 사운드, 반도체, 콘포넌트, 영화, 음악, 금융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난해 영업이익 2,887억엔 중 음악, 엔터테인먼트 및 금융 부문이 1,925억엔에 달해 회사 전체 이익의 절반을 넘었다. 히라이 사장은 2017년회계연도영업이익이 5,000억엔을 넘어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달 들어 급등하고 있는 소니 주가는 투자자들의 기대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전자입국’을 기치로 내걸고 창업한 소니가 소비시장 트렌드에 강한 비즈니스 유전자를 되살려 완전 부활로 갈 수 있을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재일 파이낸셜플래너 박혁신
박혁신은 누구,,,1990년대에 일본에 유학가 25여년 동안 살면서 현지에서 돈을 벌고 있다. 아르바이트, 식당 및 레스토랑 경영, 주식 및 부동산 투자 등을 했다. 일본에서 독학으로 파이낸셜플래너 자격증을 따고 부동산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다. 한때 주식투자로 꽤 많은 돈을 벌기도 했으며, 요즘도 일본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갖고 종목을 분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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