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관료·이익집단, 현상유지 급급
'지대추구' 없애는 게 혁신성장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1세대 미래학자 케네스 볼딩은 20세기의 의미(1964)에서 인류가 축적한 기술의 95%가 20세기에 발명됐고, 앞으로는 그 연장선이라고 봤다. 인류 역사를 ‘문명 전, 문명, 문명 후’ 등 3단계로 나눌 때, 20세기는 ‘문명에서 문명 후로 이동 중’이라는 담대한 주장이었다.
50여 년이 흘러, 그의 기술포화론은 성급한 헛다리 짚기가 돼버렸다. 구글X(구글 비밀연구소) 창립자 중 하나인 세바스찬 스런은 “여태껏 단 1%만 발명됐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미래 기술의 99%는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이미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드론 등으로 눈이 핑핑 도는데, 앞으로 어쩌란 말인가.
오늘 바뀌고, 내일은 더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모든 분야에서 혁신(革新)을 합창한다. 하지만 말로는 쉬워도 실천이 안 된다. 신산업 출현을 막는 규제 혁신(총론)에는 동의해도 자기 문제(각론)가 되면 말이 확 달라진다. 성장 불씨가 사그라들수록 기득권을 쥔 팔에 힘이 들어가는 탓이다.
왜 글로벌 100대 스타트업 중 70% 이상이 한국에선 불가능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올까. 산업화는 재빨리 따라붙었는데, 4차 산업혁명은 왜 이리 미적거릴까. 심영섭 전 산업연구원(KIET) 부원장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규제개혁 방향’에서 수집한 발목잡기 사례만 봐도 그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벤처기업 인포피아는 2004년 LG전자와 함께 세계 최초로 ‘당뇨폰’을 개발했다. 그러나 원격 의료기기는 통신대리점에선 못 판다는 판정에 해외로 나갔고, 국내에는 여태껏 발도 못 붙이고 있다. 10년 뒤 삼성전자의 ‘기어핏’은 의료기기가 아닌, 레저용으로 간신히 승인을 뚫었다. 관료들이 달라졌다기보다 목마른 기업이 우물을 팠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2008년 특허를 받은 ‘트럭지게차’는 국토교통부 내에서 수송용이냐, 건설용이냐 논란 속에 승인받는 데 4년을 허송했다. 2000년대 초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에어백도 근거 법규가 없다는 이유로 2년 가까이 장착을 못 한 사례다. 생명 안전 장치이고, 선진국에선 흔해도 그랬다. 만약 테슬라의 무인차 사망사고가 한국에서 일어났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새로운 게 등장하면 공무원들은 몸부터 사린다. 법령에 나열된 것만 허가하는 ‘포지티브’ 행정이 몸에 밴 탓이다. 5년 전 뭔지도 모르고 ‘공유 도시’를 선언한 서울시가 유상 카풀앱 ‘플러스’를 수사의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료들에게 규제가 암덩어리라고 압박해 봐야, 자기보호 본능이 발동해 정작 해야 할 일도 안 한다.
규제라면 정치가 빠질 수 없다. 입법권을 틀어쥔 국회의원들은 종종 이익집단의 민원 해결사 같다. 법까지 고쳐가며 ‘헤이딜러’를 한때 폐업시킨 게 대표 사례다. 규제프리존, 서비스업 활성화 등이 재벌에만 이익이란 편견을 가진 의원들도 많다. 이런 초고도 근시안들이 법을 만드는데 무슨 혁신이 나올까 싶다.
정치인, 관료, 이익단체는 ‘지금 이대로’가 가장 편한 이들이다. 굳이 긁어부스럼 낼 이유도, 진입문턱을 낮출 용의도, 애써 규제 법규를 완화해줄 필요도 없다. 국회 상임위부터 정부부처, 업종별 협회까지 모두 칸막이로 나누고 ‘나와바리(영역)’를 구분해놔, 융·복합 기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지대추구(rent seeking)의 독점적, 배타적 특혜가 있는 곳에선 경제 활력도, 스타트업 출현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대추구 타파가 혁신성장의 출발점이 돼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지대=부동산 불로소득’으로 착각하는 게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규제 전봇대, 손톱 밑 가시, 규제 샌드박스 등 한결같이 말만 무성했다. 대통령이 임기 내내 앞장서 지대추구, 기득권 옹호를 깬다고 해도 성과를 장담할 수 없다. 미래는 피할 수 없고, 결말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온 나라가 적폐 청산에 팔린 채, 미래에 대해선 이토록 태연해도 되는지 정말 궁금하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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