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혜 기자 ] 때는 가까운 미래. 정부에 ‘생활유지부’가 생긴다. 살인으로 인구를 조절하는 게 이들의 임무다. 한정된 자원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할 필요 없이 모두가 여유롭고 풍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모두가 이 정책을 따른다. 죽어야 할 사람은 인공지능이 매일 무작위로 선택한다.
몇 년 살지도 못한 어린아이가 희생되기도 한다. 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에게도 예외는 없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행복하다. 고된 일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걸 손에 넣고, ‘오늘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매일을 더없이 충실히 산다.
국립극단이 서울 서계동 소극장 판에서 공연하는 연극 ‘나는 살인자입니다’는 기괴한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며 시작된다. 딸의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는 ‘부인’에게 극중 ‘나’는 “이 필요악이 우리에게 준 것들을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생존경쟁 때문에 생기는 노이로제, 발광, 자살, 더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가 없는 세상. “이 정책이 없었다면 따님이 이제까지 살아있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나’의 질문은 관객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고민에 빠뜨린다.
10여 분짜리 에피소드 8개를 한 편의 연극으로 엮은 무대다. ‘생활유지부’는 첫 단편이다. 전인철 극단 돌파구 대표가 일본 공상과학소설(SF) 작가 호시 신이치(1926~1997)의 초단편 1000여 편 중 8편을 뽑아 각색하고 연출했다. 모두 죽음과 관련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삶’에 대한 이야기보다 삶을 더 강하게 조명하는 효과가 있다. 인간의 존재와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주제가 무겁지만 기괴함과 유머러스함을 버무린 대사와 연출은 관객을 자주 웃게 한다. 술집 주인이 손님 접대를 위해 만든 미모의 로봇 이야기 ‘봇코짱’에 이런 성격이 강하다. 주인의 욕심 때문에 로봇을 제외한 모두가 죽고 로봇만이 살아남는 이 이야기는 “처녀야?” “수녀는 아니죠”, “죽여줄까?” “죽여줘요” 등 간결한 대사의 연발로 웃음을 자아낸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생긴 거대한 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단편 ‘이봐, 나와!’는 기발한 표현 방식이 돋보인다. 무대에 구멍을 만들어놓고 배우들이 안을 들여다보게 한다면 관객에게는 배우의 등과 엉덩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연출은 발상을 바꿔 배우들을 눕혔다. 배우들이 무대 바닥의 한 점을 중심으로 머리를 모으고 누워 천장에 설치된 카메라를 보게 하고 카메라가 찍는 영상을 관객들이 마주보는 무대 정면에 띄웠다. 배우들이 누운 채로 고개를 들면 관객은 영상을 통해 구멍 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8편의 단편들은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의 고독, 우주선에서 조난당한 비행사들의 비애, 자신의 사생활을 너무 많이 아는 로봇을 분해하지도 녹여버리지도 못한 주인들 때문에 우주에 버려져 죽어가는 로봇들의 슬픔 등 인간은 물론 인간 너머 존재의 감정도 들여다본다. 섬뜩함과 우스꽝스러움, 슬픔 등이 다채롭게 녹아 있다. 27일까지, 3만원.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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