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열풍 일으킨 육아법
아이 넷 키운 재일동포 2세 어머니, 교수·변호사·금융투자가로 길러
게임 말고 공부하라 잔소리 안 통해… '공부할 이유' 자극했더니 성적 올라
주체성 가진 아이로 키워
중학교부터는 아이의 선택에 맡기되 '남에게 도움 될 큰사람 돼라' 조언
"밤새 제 입시 문제 풀던 어머니 모습, 인생의 갈림길마다 이정표 됐죠"
수능 끝난 한국의 수험생에게
한국에선 경쟁에 이긴 사람도 자존감 낮고 불행한 삶 많아
"주위에서 요구하는 일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찾으세요"
[ 임근호 기자 ] 지난해 2월 일본에서 출간된 《일류의 육아법(一流の育て方)》은 출간 7개월 만에 20만 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재일동포 벤처투자가 김무귀 인시아더스VC 대표와 그의 어머니 조순남 씨.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찾은 김 대표는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아이를 기르기 위한 책이 아니라 자녀가 행복한 삶을 살고 그로 인해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게끔 하는 교육법을 담은 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200명이 넘는 다양한 분야의 리더와 명문대 학생을 인터뷰했다고 했다. 질문은 ‘어린 시절을 되돌아볼 때 부모님에게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가정 교육은 무엇입니까?’이다. 하지만 책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그 자신의 경험이다. 재일동포 2세인 어머니 조씨는 교토로 시집와 네 자녀를 뒀는데 각각 캐나다 대학의 교원, 영국 런던에서 일하는 공인회계사, 일본에서 활동하는 금융·투자 전문가, 미국 뉴욕주 변호사 등으로 성장했다.
아이들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 생겨야
조씨는 1947년 일본에서 태어나 리쓰메이칸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 시대 여성으로선 상당한 고학력자지만 특별한 사회 경력 없이 결혼 후 집안일을 돕는 데 매진했다. “당시 재일동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세 가지밖에 없었어요. 파친코와 부동산, 식당이었죠. 애 아빠는 특이하게 잡지에 들어가는 광고 사업을 했는데, 잘될 때는 돈이 많이 들어왔지만 어려울 때도 많았어요. 그래서 저도 작은 식당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조씨 역시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았다. 공부하라고 잔소리도 많이 했다. 피아노와 서예 등 대여섯 가지를 마음대로 정해 아이들에게 배우라고 강요했다. 성실한 두 딸은 호기심도 많아 무엇이든 즐겁게 배우러 다녔다. 두 아들은 달랐다. 누나들을 보고 피아노나 서예도 ‘의무 교육’쯤으로 알고 다녔지만, 부모가 강제로 시킨 것이다 보니 의욕이 크지 않았다. 어느 날 셋째인 김 대표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흥분한 얼굴로 집에 뛰어와 이렇게 말했다. “엄마, 피아노는 꼭 배우지 않아도 되는 거래요!”
“지금 돌아보면 부끄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오는데 제가 피아노를 싫어하는 아들에게 피아노 배우기가 법으로 정해진 것처럼 믿게 했던 거예요.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내 마음대로 꿈꾸고는 아이에게 배우러 다니게 했던 거죠. 그런데 그날 깨달았어요. 아이는 엄마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은 무엇을 해도 주체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조씨는 공부도 아이들 자율에 맡겨 놨을까? 그는 “아이는 자유롭게 둬도, 공부하도록 시켜도 공부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아이에게 공부시키는 건 모든 부모가 난감해하는 부분이며, 왕도가 없다는 얘기였다. 아들 김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무귀야, 웬만하면 이제 공부 좀 하지 그래!” “싫어. 절대로 싫어!” “어서 공부해!” 이런 일이 반복됐다. 부모의 감시를 피해 컴퓨터 게임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학교 숙제는 거의 하지 않았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려줘도 먼 미래의 일로만 느꼈는지 남의 일처럼 흘려버리곤 했다.
조씨는 “아이를 공부시키려면 성인을 움직이게 할 때와 마찬가지로 요령 있게 자극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아이마다 의욕의 원천이 다르기 때문에 정해진 방법은 없다고 했다. 질문으로 생각하는 법을 길러주고, 스스로 공부할 환경을 조성해주고, 공부하는 이유를 솔직히 알려주는 게 기본이지만 그마저 안 될 때 보상책을 제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한다.
중학교 입시를 앞둔 김 대표에겐 열대어가 ‘당근’으로 제시됐다. 김 대표는 열대어를 정말 좋아해 용돈으로 작은 수조에 작은 열대어 몇 마리를 사서 키우고 있었는데, 아시안아로와나 같은 열대어와 커다란 수조를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학원 시험에서 1등을 하면 1만엔을 주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조씨는 “아들이 눈빛이 달라져 필사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며 “미끼 작전이 언제나 성공한다고 할 수 없고 칭찬할 만한 방법은 아니지만 최후의 수단으로 써볼 만하다”고 했다.
김 대표의 말은 약간 달랐다. “제가 돈의 유혹에 넘어가긴 했지만 의욕의 원천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2시쯤 우연히 눈을 떴는데, 내 침실 옆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어요.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지 하고 봤더니 어머니가 책상에서 제가 지망한 학교의 입시 문제를 열심히 풀고 계셨죠. 그 광경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정말로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열심이시구나!’ 하는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에 게임을 끊고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속으로 맹세했어요.”
시끌벅적 손님맞이 속 소통 능력 길러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선 공부에 대한 잔소리가 사라졌다. 어떤 대학 가라, 어떤 직업 가져라 하는 말도 없었다. 집안일로 바빠 하나하나 챙겨줄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아이들보다 훨씬 정보가 적고 시대에 뒤떨어진 부모가 진로에 너무 참견하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씨는 ‘부모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은 아이의 선택에 맡긴다’와 ‘아이에게 반대한 일이 잘못됐다고 깨달았을 때는 즉각 인정하고 철회한다’라는 방침을 그때 세웠다고 한다. “물론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과 단순히 방치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집에선 사소한 조언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방향성만큼은 남편이 강하게 조언했어요. 남편은 아이들에게 늘 ‘큰사람이 되어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혹은 월급 액수만을 기준으로 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같은 말을 자주 했어요.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말은 의외로 인생의 갈림길에서 아이들에게 이정표가 돼 주었습니다.”
나중에 미국 변호사가 된 조씨의 막내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 고등학교로 유학 갔다. 그때도 누가 옆에서 부추긴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던 조씨는 심하게 반대했고, 아들을 태운 간사이공항행 특급 열차가 교토역을 떠나자 펑펑 울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 마음을 고쳐먹고 공부를 열심히 한 김 대표는 게이오기주쿠대 종합정책과학부를 졸업했다. 그 후 UBS 애널리스트, 아서디리틀 컨설턴트, 피델리티 애널리스트를 거쳐 사모펀드 아시아얼터너티브스에서 일본과 한국 투자를 담당했다. 그러다 프랑스 인시아드(INSEAD)에서 경영전문석사(MBA)를 받고 사모펀드 유니슨캐피탈을 거쳐 지난해 싱가포르에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인큐베이터인 인시아더스VC를 세워 공동 경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비즈니스의 기본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소통 능력”이라며 “항상 손님으로 시끌벅적했던 집안 분위기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를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고등학생 때까지 산 교토 집은 대가족이었다. 주변 친척이나 이웃도 자주 찾아와 함께 식사하고 시간을 보냈다.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접하다 보니 사람을 만날 때 낯을 가리거나 겁먹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께선 찾아온 손님에게 작은 것이라도 꼭 선물을 줬는데, 그런 작은 배려가 사회에 나가면 참 중요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마침 인터뷰가 이뤄진 날은 한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기 며칠 전이었다. 그는 시험이 끝난 한국 학생들에게 이제 ‘주위에서 요구하는 일’에만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볼 것을 권했다.
“한국의 기존 시스템에선 ‘경쟁에서 이긴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 자존감이 떨어지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될 위험이 커요. 제가 만나본 세계 엘리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스스로 결정하게 해줬다’는 점을 부모에게 가장 감사하게 여긴다고 답했죠. 이는 국적을 불문하고 공통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책《일류의 육아법》의 조언
"아이에게 다양한 진로탐색 기회와 부모의 무한한 사랑 줘야"
지난 9월 한경BP를 통해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된 《일류의 육아법》은 일본에서 2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컨설팅업체와 사모펀드 등을 거쳐 싱가포르에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인큐베이터인 인시아더스VC를 세운 재일동포 김무귀 대표와 그의 어머니 조순남 씨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조씨는 네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시킨 경험이 화제가 돼 2013년부터 일본 경제지 도요게이자이(東洋經濟) 온라인판에 ‘미세스 펌프킨(ミセスㆍパンプキン)의 인생상담소’란 코너에 글을 쓰고 있다. 펌프킨은 조씨의 필명이다.
책은 저자의 경험과 세계 엘리트 200여 명을 인터뷰해 55가지 자녀 교육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들이 꼽는 세 가지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라는 것이다. 즉 주체성을 길러줘야 한다는 말이다. 김 대표는 “중요한 결정일수록 아이에게 맡기고 남과 달라도 괜찮다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는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고, 넓은 시야로 선택의 폭을 넓혀주라는 것이다. 강제로 시키는 공부나 시험 성적에만 매달리는 ‘좁은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꿈을 키우고 진로를 탐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현재의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많았던 의견이 어릴 때 부모가 다양한 방면에서 시야를 넓혀줬다는 것”이라며 “또 중요한 건 부모의 생활 방식이 자녀의 학습 습관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는 대신 부모가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부모가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라는 것이다. 사랑받고 자라난 아이는 자존감이 높고 사랑을 주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어도 애정과 신뢰를 토대로 한 따뜻한 인간관계를 구축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해질 확률이 낮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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