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과 가격의 하락은 이전에 불가능한 시도들 가능케 해
우리가 예측하는 유일한 사실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점
체스 게임은 6세기께 지금의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체스 게임의 창안자는 황제가 머물고 있는 수도 파탈리푸트라까지 직접 찾아와 체스를 선물했다. 깊은 감명을 받은 황제는 포상을 하길 원했고, 발명가는 황송해하며 그저 약간의 쌀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다만, 선물의 의미를 기리기 위해 체스판을 활용해 첫 번째 사각형에는 쌀 한 톨을, 두 번째 사각형에는 쌀 두 톨을, 세 번째 사각형에는 쌀 네 톨을 놓는 방식으로 쌀을 받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즉, 다음 칸으로 갈수록 앞칸의 쌀보다 두 배의 쌀을 더 받는 보상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체스 판은 총 64칸으로 이뤄진 정사각형이다. 서른세 번째 칸에 이르자 약 40억 알의 쌀이 지급되었다. 파산 직전에야 발명가의 계략을 눈치 챈 황제는 발명가의 목을 베어버렸다.
기하급수적 성장 이해 못하는 인간의 뇌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의 책 《21세기 호모 사피엔스》에 실린 발명가와 황제 이야기는 인간의 뇌가 기하급수적 증가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발명가의 요청을 승낙한 황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뇌는 지속되는 기하급수적 증가의 결과를 과소평가한다. 만약 마지막 칸에 이를 때까지 쌀알을 받았다면 발명가는 총 1800경의 쌀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쌀 보다 많은 양이다.
발명가와 황제 이야기는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어 아래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례들이 현실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즉, 오늘날 비로소 체스 판의 서른세 번째 칸에 도달한 것이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2000년 당시에는 겨우 상상으로만 생각해볼 수 있었던 일들이 불과 5~6년 이후부터 우리 눈앞에 현실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의 시작으로 알려진 애플의 아이폰이 2008년에 출시되었고, 의사와 같이 환자를 진단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기술인 IBM의 왓슨은 2011년 미국의 TV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쇼퍼 프로젝트>로 시작된 구글의 자율주행 자동차 개발 시점도 2010년이며, 2014년 시제품이 공개되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이런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지 발명가에게 속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기하급수적 성장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디지털 기술의 기하급수적 성장
디지털 기술의 기하급수적 성장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이면에는 18개월마다 회로의 집적도가 두 배씩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이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무어의 법칙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디지털 기술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새로운 기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빨라지고 저장용량은 늘어난 반면 크기는 작아지고 가격은 내려갔다.
1996년 모의 핵실험을 위해 미국 정부가 개발한 슈퍼컴퓨터 ‘아스키레드’는 1년 만에 그 성능이 무려 1.8배나 더 빨라졌다. 이후 9년 뒤 일본의 전자회사 소니는 동일한 성능의 컴퓨터 개발에 성공했다. 테니스장 면적의 80%를 차지했던 아스키레드와는 달리 보관에 필요한 면적이 책 한권 크기에 불과했고, 가격은 단돈 500달러였다. 내외부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보여준 이 컴퓨터의 이름은 ‘플레이 스테이션 Ⅲ’다. 정부 연구소에서나 가능했던 성능의 PC가 각 가정의 게임용으로 보급되는 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은 셈이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체스 판의 서른세 번째 칸을 지난 현재 시점부터의 변화는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벗어난다.
서른두 번째 칸까지 지속적으로 축적된 지수적인 성장에 더해 서른세 번째 칸부터는 한 칸만 더 이동하더라도 그 변화의 폭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지금부터의 변화는 과거의 연장선상이 아니다. 기술의 발전과 가격의 하락은 이전에 불가능했던 다양한 시도를 가능하게 만든다. 즉, 과거에 축적된 진보를 바탕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과거는 더 이상 미래를 예측하거나 판단하는 데 좋은 기준점이 되지 못한다. 지수적인 성장 속에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점이다. 4차 산업혁명을 규정짓는 대표적인 특징인 기하급수적인 성장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특정 시기의 단순한 유행으로만 여길 수 없는 이유이다.
김동영 < KDI 전문연구원 kimdy@kdi.r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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