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없는 사회'는 위기 감지·대응 속수무책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양적 완화’ 정책이 등장하자 미국에서는 폴 크루그먼 당시 프린스턴대 교수와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가 학계에서 제대로 검증도 안 된 ‘소득주도 성장론’을 내걸고, 사상 최대폭의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파격적인 정책을 잇달아 내놓았는데도 국내 경제학계에서는 논쟁다운 논쟁이 없다. ‘침묵하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한국경제신문이 국내 경제학자 50명을 대상으로 한국 경제학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한경 12월4일자 A1, 3면 참조). 설문에 참여한 경제학자들의 86%는 “정부 정책이나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78%는 “국내 경제학계에서 논쟁이 사라졌다”고 했다. 생각과 현실이 따로 노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정권 초기 정부 정책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게 부담스러웠다”는 고백은 그냥 흘려들을 얘기가 아니다. 경제학계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가 ‘싱크탱크의 위기’에 직면한 형국이다.
정책 비판이 부담이 되는 사회에서는 다른 주장이 나오기 어렵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임원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관련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가 정권 실세들의 ‘융단폭격’을 받았던 게 얼마 전 일이다. 이를 본 대학 교수들은 학회에서조차 자기 주장을 펴는 걸 꺼리고 있고, 대학 부설 연구소 역시 ‘침묵 모드’에 들어간 모습이다. 기업 소속 경제연구소도 보고서를 잘못 내면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내부 컨설팅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상대적으로 활발히 정책 대안을 제시하던 한국경제연구원은 전국경제인연합회 관련 단체라는 이유로 문 정부 들어 급격히 위축되고 있고, 자유경제원은 존재감이 안 보인다.
반면, 집권 여당 연구소 주변에는 ‘폴리페서’들이 몰려들고 있다. 정부출연연구소는 일제히 새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다. 여기에 일부 시민단체 싱크탱크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부와 손잡고 ‘선명성 경쟁’을 벌이고 있고, 정치색 짙은 비영리 싱크탱크도 기다렸다는 듯이 줄서기에 가세하고 있다.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정상적인 싱크탱크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래서는 포퓰리즘적 정책만 쏟아질 뿐, 혁신적인 정책이나 국가 미래와 관련한 중·장기 연구는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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