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줄리아 리의 일생

입력 2017-12-07 17:28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미국 펜실베이니아 탄광촌에서 우크라이나 이민자의 딸로 태어난 줄리아 멀록. 여섯 살 때 닥친 대공황 속에서 아버지는 진폐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학교도 겨우 다닐 정도로 가난했다. 훗날 조선 왕가의 마지막 세손빈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스물한 살 때 군에 입대한 그녀는 해군 소속 화가에게 감명을 받고 제대 후 프랭클린미술학교에 들어가 그림과 디자인을 공부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의 뉴욕 설계사무소에 입사해 일의 재미에 푹 빠졌다. 이후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스페인 유학을 결정했다.

그때 MIT 출신의 한 젊은 건축가가 입사했다. 지적인 동양 청년이었다. 그녀는 진중하면서도 자상한 성격의 그에게 매료됐다. 하지만 나이가 여덟 살이나 많아 내색할 수 없었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가구를 처분하던 어느 날, 그가 집으로 찾아왔다. “떠나지 말아요.”

그의 요청을 세 번째 들은 날 그녀는 유학 대신 사랑을 택했다. 남자 이름은 이구(李玖). 그녀는 그를 ‘쿠’라고 불렀다.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아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1958년 뉴욕에서 결혼한 둘은 1963년 옛 황실 인사의 귀국 허용에 따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푸른 눈의 세자빈’ 줄리아 리. 남편 말대로 ‘웃는 모습이 예쁘고 성실한’ 그녀는 시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명휘원 사업을 열심히 도우며 며느리 역할을 잘 해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서양 세자빈을 못마땅해하던 종친회는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종용했다. 결국 1977년 반강제로 별거에 들어간 그녀는 19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 뒤로 ‘줄리아 숍’이란 의상실을 경영하며 복지사업을 계속했지만 외국인 임대주택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 5년 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쿠를 만나고 싶다”며 한국을 다시 찾았지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에게 주려던 조선왕가 유물과 사진 450여 점은 덕수궁박물관에 기증했다.

2005년 7월16일 남편이 도쿄의 한 호텔에서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했다. 그러나 장례식에 초청받지 못했다. 휠체어를 탄 채 세운상가 근처 군중 속에서 남편의 노제(路祭)를 지켜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난달 26일, 그녀는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혼자 생을 마감했다.

“쿠를 다시 만나 ‘(나와 헤어진 뒤) 행복했나요?’라고 물어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던 벽안의 세자빈. 부음마저 닷새가 지난 뒤에야 알려질 정도로 쓸쓸하게 살다 간 파란만장의 삶이었다. 그녀의 한국명 이주아(李珠亞)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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