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기술 강국으로 자리잡은 스위스
겨울왕국 CG도 '메이드 인 스위스'
세계적 AI 연구소만 20개 넘어
비용 많이 드는 연구도 적극 지원
톱다운 방식 정부개입 없기 때문
느리지만 변화에 강한 나라
변화대처능력 국가 1위 선정
경쟁력 없는 기업은 도태시켜
4차 산업 발전의 밑거름으로
[ 허란 기자 ] 스위스는 1971년이 돼서야 여성의 연방 선거 투표권을 인정했다. 학생들은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학교에 나온다. 이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는 상향식 시스템의 근간으로 정부 주도의 일사불란한 정책은 기대하기 어렵다. 여전히 스위스 국가 이미지 조사에선 ‘산’ ‘눈’ ‘초콜릿’이 단골 답변으로 등장한다. 한마디로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변화에 느리다.
이런 스위스가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몰고 올 장기 변화에 가장 잘 준비된 나라 1위에 이름을 올렸다. 로봇은 물론 드론(무인항공기) 자율주행 인공지능(AI) 등 최첨단 혁신기술 분야 인재와 기업, 벤처자금이 몰리고 있다. 과학기술 전문지 와이어드 편집장 출신이자 드론 전문업체 3D로보틱스 창업자인 크리스 앤더슨의 진단처럼 스위스는 ‘로봇공학의 실리콘밸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업, 돈, 인재 몰리는 스위스
스위스 취리히 로봇 클러스터는 미국 캘리포니아 베이 지역의 축소판이다. 구글 애플 IBM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 디즈니 고프로 오라클 삼성 보쉬 ABB 등 글로벌 기업의 사무소와 스위스 법인이 들어서 있다. 구글은 본사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제외하고 가장 큰 구글캠퍼스를 취리히에 두고 있다. 이곳에는 AI 전문가 250여 명을 포함해 2500명의 엔지니어가 근무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컴퓨터그래픽 작업도 디즈니 스위스법인에서 탄생했다.
컴퓨터 바둑 고수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는 스위스 루가노대의 인공지능연구소(IDSIA) 출신이 세운 회사다. 추그지역에 있는 크립토밸리는 블록체인 가상화폐 기업에 유리한 기업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대한 문턱도 낮다. 각국에서 온 스타트업은 ‘임팩트 허브 취리히’에서 2~3개월가량 머물면서 다양한 기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스마트 로봇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리와이어드는 영국 런던에 이어 지난달 1일 스위스 로잔에 유럽 기지를 설립했다. 리와이어드 창업 멤버이자 투자매니저인 이재용 씨는 “스위스엔 세계적인 AI 연구소가 20개가 넘는다”며 “정부가 무슨 기술에 투자할지 등 톱다운 방식의 개입이 없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는 기업과 연구소만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기업과 돈이 몰리고 있는 이유는 인재가 많아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2017년 세계인재보고서’와 프랑스 인시아드(INSEAD)의 ‘2017년 세계인적자원경쟁력지수’에서 스위스는 모두 1위에 올랐다. 이 밖에도 비영리기관인 광역취리히투자청(Greater Zurich Area AG)의 레토 시들러 커뮤니케이션·마케팅부문장은 “정치경제적 안정성과 낮은 세율 및 규제 장벽, 친기업적이고 실용적인 당국도 기업들이 스위스에 몰리고 있는 이유로 꼽힌다”고 설명했다.
인재의 산실 취리히공대
스위스 로봇산업 인재 양성의 산실로 세계 10위권에 드는 취리히연방공과대(ETH)가 꼽힌다. 이곳 로봇 시각화 랩(v4rl)은 시각인지와 인공지능을 결합해 볼 수 있는 로봇을 개발 중이다. 이 랩을 이끌고 있는 마르가리타 크리 교수는 “연구 성과를 위해선 좋은 석·박사 학생을 영입해야 하는데 ETH는 여기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로봇공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황보제민 씨는 “4족보행 로봇은 비용이 많이 들어 다른 대학에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분야지만 ETH는 당장 상업성이 없더라도 다양한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HT의 교수와 박사과정 학생 중 외국인 비중은 60%에 달한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ETH는 직접 기술 상업화를 추진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이스라엘의 히브리대나 와이즈만연구소가 기술지주회사를 앞세워 적극적인 기술 상업화를 추진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대신 글로벌 회사나 대학과의 연구 협력이 핵심 관심사다. 기업이 ETH 교수와 연구 프로젝트를 하면 스위스 정부가 해당 교수에게 ‘혁신기금’을 지원한다. ETH에는 매년 25개의 스핀오프 기업이 설립된다. 그중 90%가 설립 5년 뒤에도 살아남아 운영되고 있다.
지리적 약점에서 발전한 기계산업
스위스는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다. 남쪽으로는 알프스산맥 너머로 이탈리아와 맞닿아 있다. 국토(4만1285㎢)는 남한 면적의 41% 정도로 70% 이상이 산지다. 스위스는 이런 지리적 약점을 유럽 교통의 허브라는 이점으로 바꿨다. 산업화와 함께 1870년대 알프스 산맥에 고타드 기차 터널을 뚫었고, 2300여 개 자치구마다 철도와 도로가 속속들이 연결됐다.
척박한 환경 때문에 일찍부터 시작한 인프라 개발은 기계·전기·정밀기기산업 발전의 토대가 됐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스위스 시계산업도 정밀기기 발전에 기여했다. 제조업 강국 스위스의 주요 수출품은 제약·화학제품(34%), 기계·전기기기(20.9%), 정밀기계·시계(16.9%)다.
스위스는 정치적으로는 중립국이자 26개 주로 구성된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친기업 환경을 만드는 요인이다. 프랑스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투자 정책이 바뀔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는 식의 강대국 특유의 텃세가 거의 없는 것도 해외 기업엔 이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장기 변화에 강한 나라 1위
제조업 강국의 면모는 스위스를 장기 변화에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사인 KPMG가 2년마다 집계하는 변화대응능력지수(CRI)에서 올해 136개국 가운데 1위에 올랐다. 2015년엔 싱가포르에 이어 2위였으나 기업(2위) 정부(4위) 시민사회(1위) 역량을 종합한 결과 최고 점수를 받았다.
시민역량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교육의 힘이 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1인당 공교육 지출이 가장 높은 국가다. 9년간 의무교육이 끝나면 전체 학생의 3분의 2는 기업 실습과 직업학교 수업을 병행하는 수습과정(이중교육시스템)으로 진학한다.
낙오자는 도태하게 내버려두는 시스템도 스위스를 단련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스위스는 대학 입학시험은 쉽지만 1학년이 끝나면 절반 이상을 탈락시킨다. 경쟁력이 없는 기업을 공적자금으로 살려두지 않으며, 농업 등 전통산업에 대한 보조금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 덕분에 살아남은 기업은 4차 산업혁명 변화의 파고를 이겨낼 만한 저력이 있다는 설명이다.
222년 전 방적 부품회사에서 자동차 소음방지 분야 세계 최고 회사로 변신한 리에터, 브라운보버리를 모태로 한 ABB, 제너럴일렉트릭(GE)과 지멘스의 100년 전통 전기부품 공급업체인 본롤 등 굵직한 기계산업 제조업체들이 4차 로봇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취리히=허란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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