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정원도시' 꿈 이루고 '매직 시티'로… 싱가포르 스토리에 빠져봐 !

입력 2017-12-17 15:25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싱가포르 여행



낮에 바라본 싱가포르는 고층 빌딩이 빼곡한 도심 풍경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하게 정돈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밤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도시 전체가 거대한 스테이지로 바뀐다. 싱가포르를 좀 안다는 누군가는 서울보다 조금 크고 제주도보다는 훨씬 작은 도시 싱가포르의 진정한 매력은 흐트러지지 않는 단아함이라고 했다.

싱가포르의 매력 속으로 더 깊게 빠져 보고 싶어졌다. 아직 많은 여행자들이 발견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싱가포르가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모습과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비좁고 척박한 땅에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싱가포리언(Singaporean)의 드라마틱한 역정 속에는 왠지 알고 나면 여행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나무 심기에서 시작된 정원도시의 꿈

열대 기후에 속한 싱가포르에는 각종 진귀한 나무와 꽃이 가득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싱가포르는 원래 국토의 3분의 2가 펄과 늪이었다. 지표 고도가 15m가 채 되지 않는 지형 탓에 한 번 섬으로 유입된 물이 바다로 흘러나가지 못하고 펄과 늪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지금과 같은 녹음이 짙은 도시 모습을 갖추게 된 건 1965년 초대 총리인 리콴유(李光耀)가 나무를 심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싱가포르 도시개발의 핵심 콘셉트인 정원도시(garden city) 프로젝트도 이때 시작됐다.

평소 녹지의 필요성을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그는 정계 은퇴 후 자신의 최고 업적으로 정원도시 프로젝트를 꼽았다.


현재 싱가포르 섬 전체에 심어진 가로수는 300여만 그루에 달한다. 매년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데 평균 3만5000싱가포르달러(약 2800만원)의 정부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지금은 나무도 많고 전체 인구의 15%가 넘는 사람들이 원예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지만 처음 나무를 심기 시작했을 때는 인력도 부족했다. 1965년 국민 중에서 원예전문가를 모집했는데 수소문 끝에 모은 인원이 4명에 불과했다. 이들조차 영국인 가정집에서 화단을 가꾸던 정원사 등으로 대부분 원예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싱가포르의 나무 사랑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창이국제공항은 원래 벤저민과에 속하는 창이(Changi)나무 이름을 따 지었다. 나무가 귀한 싱가포르에서 자라던 이 나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공습을 막기 위해 모조리 베어내면서 씨가 말라버렸다. 창이나무에 얽힌 최근의 일화도 있다. 공항 근처 공사현장에서 오래된 창이나무 한 그루가 발견돼 온 나라가 들썩였는데 인부 하나가 그만 실수로 그 나무를 그냥 베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 나무는 싱가포르 동물원 앞에 모형으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2012년 개장해 지금까지 3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 마리나베이의 인공정원 가든스 바이 더 베이도 싱가포르의 열렬한 나무 사랑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밤이면 붉을 밝히는 거대한 슈퍼트리 그로브로 유명한 이곳에는 해발 1000~3500m의 환경을 재현해놓은 클라우드 포레스트와 플라워돔에 지중해와 아프리카, 호주 등지에서나 볼 수 있는 각종 나무와 식물이 자라고 있다.

나무 심기로 시작한 정원도시 프로젝트는 현재 도심공원을 하나로 연결하는 파크커넥터(park connector)로 이어지고 있다. 도심 어디에서든 100m 이내 공원에 닿을 수 있도록 400여 개의 공원을 조성하고 이들을 고공다리로 연결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바다를 메워 만든 기적의 도시

나무 심기로 시작한 싱가포르 정원도시 이야기를 접하고 나니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살피면 작은 도시가 품고 있는 갖은 이야깃거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싱가포르 도심 센트럴 지구 차이나타운에 있는 시티 갤러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정원도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가이드가 적극 추천해준 곳이다.

싱가포르 도시개발청(URA)이 운영하는 이곳은 도시 박물관이자 홍보관 같은 곳이다. 총 세 개 층에 걸쳐 정교함이 돋보이는 도시 미니어처와 영상, 사진 등 50여 년 싱가포르 도시개발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굳이 도시개발에 흥미를 못 느끼는 여행자라 할지라도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도시 지형과 지역을 한눈에 담기 위해 한 번쯤은 가볍게 둘러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의 도시개발 계획은 1971년 시작됐다. 10년 단위로 계획의 콘셉트를 설정하고 5년마다 그에 따른 세부계획을 세우는 방식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놀랍게도 싱가포르 도시개발의 핵심은 간척사업이었다. 현재 싱가포르 국토 면적은 697㎢로 서울(605㎢)보다 조금 큰 수준이다. 하지만 원래 싱가포르는 서울보다도 작은 580㎢였다. 싱가포르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히는 마리나베이 샌즈와 가든스 바이 더 베이가 있는 약 5㎢ 규모의 마리나베이는 바다를 메우는 데만 2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바다를 메우는 작업은 해안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쓸모없는 작은 섬 사이 바다를 메워 하나의 쓸모 있는 큰 섬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70개 넘던 섬이 63개로 줄었다. 대규모 화학산업단지가 들어선 주롱섬이 대표적인 예다. 이 섬은 남서쪽 해안에 있던 7개의 작은 섬 사이 바다를 메우기 시작한 지 15년이 지난 2010년 32㎢ 크기의 주롱섬으로 재탄생했다.

싱가포르 도시개발 계획은 최근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지난 40여 년간 모래를 공급해주던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이 2007년과 2009년 공급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그리스를 대안으로 검토했지만 막대한 물류비용에 타산이 맞지 않았다. 결국 정부에선 오는 2022년을 기점으로 간척사업을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40여 년을 이어온 싱가포르 도시개발이 마침표를 찍는 건 아니다. 시티 갤러리에서 확인한 싱가포르 도시개발 방향은 이미 오래전부터 바다에서 발아래 지하로 향해 있었다.

창고에서 수변경관 명소로 재탄생한 ‘클락키’

시티 갤러리에서 나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를 더 알고 싶다면 도시의 역사나 성장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도시개발 역사가 시작된 1960년대 수상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리버사이드로 향했다. 싱가포르 금융 중심지인 래플스 플레이스 인근에 있는 리버사이드는 도심을 가로지로는 싱가포르 강변이다.


사실 이곳은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다. 밤이면 강변을 따라 늘어선 펍과 클럽, 레스토랑이 화려한 조명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홍등으로 치장한 30~40인승 규모의 리버크루즈(통캉·Tong Kang)가 유유히 강물 위를 떠다녀 운치를 더해주는 곳이다.

보트키(Boat quay)~클락키(Clarke quay)~로버트슨키(Robertson quay)로 이어지는 리버사이드는 1960년 중반까지 약 100년간 싱가포르 수상무역의 거점이었다. 그중에서도 클락키는 교역량이 많은 보트키의 배후 물류단지로 각종 향신료와 통조림 등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가 들어섰던 곳이다. 수상무역이 쇠퇴하고 강물이 심하게 오염되면서 30여 년의 재생사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밤이 아닌 낮에 클락키를 찾은 건 이곳이 가장 대표적인 도시재생 사례이기 때문이다. 블록을 기준으로 A~E까지 5개 구역으로 나눠놓은 클락키를 거닐다 보니 마치 정겨운 유럽 작은 마을의 도심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예전 물류창고로 쓰이던 건물에는 당시에 쓰이던 이름을 새긴 간판이 마치 훈장처럼 보란 듯 걸려 있어 과거의 흔적을 대신했다. 더러 사람들로 붐비는 매장을 지날 땐 그 옛날 무역상과 선원들이 한데 어울리던 모습이 저랬을까 하는 생각에 넉살 좋게 한번 무리에 그냥 섞여볼까 하는 충동마저 느껴졌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려고 하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화려한 싱가포르 도심 속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듯 과거의 흔적들을 하나둘 찾다 보니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부촌으로 꼽히는 오차드로드에서 차로 10~15분 떨어진 뎀시힐(Dempseyhill)은 클락키와 같이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980년 중반까지 군대가 주둔하던 이곳은 영국군이 사용하던 막사와 무기고 등 시설을 내부 인테리어만 바꿔 심플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의 레스토랑과 카페, 갤러리 촌으로 재탄생시켰다.

마리나베이 해안에 2001년 문을 연 더 플러튼호텔은 1829년 방어를 목적으로 세워진 요새로 시작해 1928년 우체국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지금도 건물 곳곳엔 외부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대포를 설치했던 포구를 찾아볼 수 있다. 리콴유 총리가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강제 분리당하고 독립을 선언한 옛 시청사와 법원은 내셔널 갤러리로 이름을 바꿔 재사용하고 있다. 부가스 지역에 있는 아트 뮤지엄 본관 건물은 싱가포르 최초의 가톨릭 학교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카탕 지역에 있는 페라나칸 뮤지엄은 서양식 건축기법으로 지어진 학교 건물을 2008년 리모델링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소수 인종에서 주류로 성장한 ‘페라나칸’

가로수에서 시작해 도시개발 그리고 쓰임새가 바뀐 옛 건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쫓던 중 오차드와 함께 싱가포르 제2의 부촌이라는 카통(Katong) 지역에서 독특한 건물을 발견했다. 스페인식 테라스와 프랑스식 창문을 지닌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과 무슨 색이라고 콕 집어 말하지 못할 정도로 독특한 컬러로 외관을 꾸며놓았다. 싱가포르 혼혈인종인 페라나칸(Peranakan)의 전통 가옥이었다.


다민족 국가인 싱가포르는 사회적으로 인종에 따른 차별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통령도 각 인종 간 형평성을 고려해 돌아가면서 맡는다. 언어도 영어를 비롯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등 4개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도로 표지판도 4개 언어를 각각 표기하고 종교도 별도의 국교를 선정하지 않고 불교와 회교, 기독교, 힌두교를 모두 똑같이 인정하고 있다.

싱가포르 전체 국민 중 70%를 차지하는 중국계가 대부분이지만 말레이계와 인도계도 10~15%에 이른다. 말레이계 이주민과 중국계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을 가리키는 페라나칸은 그 비중이 1%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은 싱가포르 사회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심지어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가 결합된 페라나칸이야말로 다민족 국가인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엔 말레이계와 중국계가 합쳐진 혼혈족을 가리키던 페라나칸의 의미가 전체 혼혈족을 상징하는 말로 통용되고도 있다.

싱가포르 사회에서 페라나칸의 존재감은 싱가포르항공사 여성 승무원 유니폼에서도 알 수 있다. 긴 치마에 황금색과 붉은색 문양이 새겨진 유니폼은 페라나칸 여성들이 즐겨 입던 전통 의상 사롱 케바야(Sarong Kebaya)에서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했다.

페라나칸의 독특한 문화는 페라나칸 뮤지엄이나 카통지역을 가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두 개의 문화를 조화롭게 반영하려던 노력과 고민의 산물일까. 전시실에서 본 페라나칸들이 사용하던 가구와 옷, 그릇 등 유물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비즈공예로 만든 화려한 액세서리, 독특한 문양과 다양한 색상으로 그릇 내부까지 색깔을 입힌 도자기와 그릇, 유럽과 중앙아시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원목으로 만든 가구는 마치 장점만 골라 섞어놓으려 한 것처럼 독특한 디자인과 구조를 하고 있었다.

페라나칸 뮤지엄을 나와 카통 거리를 걸으면서 문득 싱가포르 여행 첫날 공항에서 만난 가이드가 개방성과 다양성만큼 싱가포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행정보

싱가포르 도시 여행의 묘미는 뭐니 해도 화려한 야경이다. 도심에서 야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으로는 높이 165m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관람차 ‘싱가포르 플라이어’와 지상 200m 높이에 조성된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 공중정원 ‘스카이파크’, 에스플러네이드몰 꼭대기에 있는 야외정원 ‘루프테라스’ 등이 대표적이다. 플라이어는 성인 1인 요금이 33싱가포르달러이며 스카이파크는 23싱가포르달러다. 루프테라스는 무료다.

시원한 맥주나 칵테일 등을 마시며 도심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는 내셔널 갤러리 6층에 있는 루프톱 바 ‘스모크&미러스’와 플러튼 베이 호텔에서 운영하는 ‘랜턴’ 등도 추천할 만하다. 짐을 나르던 작은 범선 통캉을 개조한 ‘리버크루즈’는 싱가포르 강을 타고 클락키에서 출발해 마리나베이까지 약 40분 동안 여유롭게 도심을 감상할 수 있다.

오후 7시30분, 9시에 출발하는 배를 타면 마리나베이 샌즈에서 펼쳐지는 라이트 쇼를 물 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운행 간격은 15분이며 요금은 25달러.

싱가포르=글·사진 이선우 기자 seonwoo.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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