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저무는 '핑크 타이드'

입력 2017-12-19 18:03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중남미만큼 역사·문화 동질성이 뚜렷한 대륙도 드물다. 지난 500여 년간 유사한 역사 체험 결과다. 대항해와 식민지배, ‘콜럼버스의 교환’과 원주민 몰락, 설탕과 흑인노예, 가톨릭 세례, 사회주의 득세….

별칭인 라틴아메리카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명명했다. 앵글로아메리카(미국 캐나다)와 대비해 라틴족 영향권임을 천명한 외교전략이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의 영향이 짙어 그럴 만도 했다. 브라질(포르투갈어) 외에 모두 스페인말로 통한다.

또다른 공통 경험이 시몬 볼리바르(1783~1830)가 주도한 19세기 초 독립 바람이다. 베네수엘라의 유복한 크리올(중남미 태생 백인) 출신인 볼리바르는 스페인 유학 중 프랑스혁명에 고무돼 1807년 돌아와 독립에 매진했다. 짧은 생애동안 1817년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5개국을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나라명 볼리비아부터 베네수엘라의 통화, 헌법, 공항 등 곳곳에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볼리바르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미합중국처럼 연방국가인 ‘대(大)콜롬비아’를 구상했다. 그의 꿈은 국가 간 분열로 무산됐지만 중남미에 좌파 이념이 깊게 뿌리내려 훗날 종속이론, 해방신학의 밑바탕이 됐다. 볼리바르와 쿠바혁명(1959) 주역인 체 게바라는 희생 이미지가 강해 중남미에선 종종 예수에 비유된다.

볼리바르의 꿈이 21세기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좌파 물결)’로 부활했다. 핑크 타이드란 1990년대 말부터 약 15년간 남미 12개국 중 10개국에 좌파정권이 파도치듯 들어선 것을 가리킨다. 뉴욕타임스의 래리 로터가 2005년 처음 쓴 용어다. 그 출발은 ‘볼리바르 후계자’를 자처하며 1999년 집권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다. 차베스는 세계 최대 석유매장량에 힘입어 오일머니를 뿌려대며 ‘좌파벨트’를 구축했다. 볼리바르식 사회주의와 아르헨티나 페론식 포퓰리즘의 결합이었다.

맹위를 떨치던 핑크 타이드가 차베스 사망(2013년) 이후 급속히 퇴조하고 있다. 엊그제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우파 피녜라가 당선되면서 남미 우파정권이 7개국으로 늘어났다. 석유, 구리 등 원자재값 하락으로 돈줄이 마른 게 좌파 몰락 요인으로 꼽힌다. 중앙아메리카에서도 멕시코 온두라스 파나마에 우파정권이 들어섰다. 중남미에선 살만 하면 좌파가, 살기 힘들면 우파가 들어서는 게 상례다. 프랑스 스페인 등이 최근 노동개혁에 매진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핑크 타이드’가 끝났다고 보긴 이르다. 올초 에콰도르에 좌파정권이 들어섰고, 생필품 부족으로 국민 체중이 급감한 베네수엘라도 좌파정권이 아직 건재하다. 내년 대선이 예정된 멕시코, 브라질에서도 좌파후보가 앞서고 있다. 결국 경제·민생이 중남미의 운명을 좌우할 것 같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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