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16년 5월12일 선고 2015다 243347 판결)
최승재 < 세종대 법학부 교수 >
자살에 대한 인식이 좋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자살을 종교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금지되는 행위로 규정해 억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니 사망보험에 가입한 뒤 자살한 사람에게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이 지지받았다. 보험 법리상 자살은 외래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 외에 자살 방지라는 정책적인 목적에서도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험에 든 사람이 자살하더라도 일정한 면책기간이 지나면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입법적인 변화가 이뤄졌다. 자살해서 보험금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도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1~3년 정도 길게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어려우며, 그래도 자살한다면 이는 정신적인 결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자살은 보험금 지급 안 된다는 생각 변해
정신병에 의한 자살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단은 여러 국가에서 인정하는 법리다. 현재 대부분 보험약관은 면책기간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서 획일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면책기간이 설정됐다고 해서 자살이 급증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보험자나 보험단체의 건전성 문제도 항상 고려해야 한다. 자살자에게 지급하는 보험금은 보험료 인상을 통해 결국 선량한 보험 가입자에게 전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는 사회·문화적인 측면도 있다. 일본에서는 소위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수많은 가족이 붕괴됐다. 이 과정에서 가장의 보험 가입 후 자살이 사회현상으로 부각됐다. 생명보험에 든 뒤 자살해 보험금을 가족이 받도록 하는 것이 가장으로서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 가장의 자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가 논란이 됐다.
한국에서도 일본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대법원이 2016년 5월12일 선고한 ‘2015다 243347’ 판결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 보험법에는 면책기간이 지나면 자살이라도 보험금을 지급하는 규정이 있는데, 이 사건에서는 재해사망특약인데도 자살보험과 같은 조항이 들어 있어서 그 해석이 문제가 됐다. 특정 보험회사만이 아니라 국내 대다수 보험회사가 같은 오류를 포함한 보험 약관을 사용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이다.
예외조항 둔 약관이 문제
A씨는 2004년 8월 피고(보험회사)와 무배당 K베스트플랜CI보험계약(이 사건 주계약)을 체결하면서 별도로 추가 보험료를 납입하고 무배당 재해사망특약(이 사건 특약)에도 가입했다. 이후 2012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 부모는 A씨의 자살이 재해사망에 해당하므로 재해특약에 따른 보험금까지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다.
이 사건 주계약 약관 제21조는 ‘피보험자가 보험기간 중 사망하거나 장해등급분류표 중 제1급의 장해 상태가 됐을 때는 보험 가입금액에 가산보험금을 더한 금액의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이 사건 특약 약관 제9조는 ‘피보험자가 보험기간 중 재해분류표에서 정하는 재해를 직접적인 원인으로 사망하거나 장해분류표 중 제1급의 장해 상태가 됐을 때는 추가로 5000만원의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 주계약 약관 제23조 제1항과 이 사건 특약 약관 제11조 제1항은 각각 독립적으로 ‘회사는 다음 중 어느 한 가지 경우에 의해 보험금 지급 사유가 발생한 때는 보험금을 드리지 아니하거나 보험료 납입을 면제하지 아니함과 동시에 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습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어 제1호에서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 그러나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와 계약의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이 경과한 후에 자살하거나 자신을 해침으로써 장해등급분류표 중 제1급의 장해 상태가 됐을 때는 그러하지 아니합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 2심 판단은 엇갈려
1심 법원은 약관에 적힌 그대로 자살한 경우에도 특약에서 정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2심 법원은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이 아닌 경우에는 ‘자살면책’이 된다는 점은 보험 약관에 적혀 있지 않아도 전제돼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시각에서 2심 법원은 이 사건 특약 약관 제11조 제1항 제1호 단서는 피고가 이 사건 특약 약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옛 생명보험 표준약관(2010년 1월29일자로 개정되기 전의 것)을 부주의하게 그대로 사용함에 따라 이 사건 특약 약관에 잘못 포함된 것으로 재해를 원인으로 한 사망 등을 보험사고로 하는 이 사건 특약에는 적용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보험 약관을 해석할 때는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에 따라서 잘못 약관을 적어도 평균적 일반인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대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봤다. 이 사건 특약은 주계약에 부가돼 있지만 보험업법상 제3보험업의 보험종목에 속하는 상해보험의 일종으로, 생명보험 일종인 이 사건 주계약과는 보험의 성격을 달리하고, 그에 따라 보험사고와 보험금 및 보험료를 달리하는 별개의 보험계약이다. 따라서 이 사건 특약 약관 제11조 제1항 제1호는 이 사건 주계약 약관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이 사건 특약 약관 제9조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 약관 해석 준칙 제시
이 사건 특약 약관 제9조는 ‘재해를 직접적인 원인으로 사망하거나 제1급의 장해 상태가 됐을 때’를 보험금 지급 사유로 규정하고 있고, 고의에 의한 자살 또는 자해는 우발성이 결여돼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건 특약 약관 제11조 제1항 제1호를 이 사건 특약 약관 제9조에 정한 보험금 지급 사유가 발생한 경우에 한정해 적용하는 면책 및 면책 제한 조항으로 해석한다면 이 사건 특약 약관 제11조 제1항 제1호는 처음부터 그 적용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규정이 된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특정 약관 조항에 대해 약관 규제에 관한 법률에 의해 그 효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약관 해석에 의해 이를 적용 대상이 없는 무의미한 규정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인 고객의 이해 가능성을 기준으로 할 때도 그 조항이 적용 대상이 없는 무의미한 조항임이 명백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 특약 약관 제11조 제1항 제1호를 그와 같이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평균적인 고객의 이해 가능성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위 조항은 고의에 의한 자살 또는 자해는 원칙적으로 우발성이 결여돼 이 사건 특약 약관 제9조가 정한 보험사고인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예외적으로 단서에서 정하는 요건, 즉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와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이 경과한 후에 자살하거나 자신을 해침으로써 제1급의 장해 상태가 됐을 경우에 해당하면 이를 보험사고에 포함시켜 보험금 지급 사유로 본다는 취지로 이해할 여지가 충분하다.
보험계약을 할 때 보통은 보험모집인의 권유에 따라 계약을 하게 된다. 이때 보험회사가 보험 약관에 스스로 잘못된 조항을 넣었다고 하면서 평균적인 보험계약자는 당연히 보험금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험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달리 해석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 판단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 보험약관 정교함은 보험업계 능력치 척도
‘2015다 243347’ 사건은 이후 소멸시효 완성 여부가 추가적인 쟁점이 됐다. 즉 일부 보험사는 보험금은 약관대로 지급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됐기 때문에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고 대법원은 이들이 주장하는 소멸시효 완성을 인정했다. 그런데 금융감독원은 소멸시효 완성에도 불구하고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했다.
이 사건의 발생이 보험회사들이 보험 약관을 서로 무비판적으로 가져다 쓰는 것에서 시작됐다는 점은 우리 보험산업 전체를 두고 볼 때 슬픈 일이다. 실제 소송에서 보험회사들은 이런 실수가 있었다고 자인하면서 자신들이 약관을 작성할 때의 진정한 의사와 달랐다고 주장했다.
보험약관의 정교함은 그 나라 보험업계 능력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우리 보험회사들의 역량이 재해보험약관 작성에서 드러난 것이 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보험산업은 금융산업 전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법원 판결은 보험약관 해석 원칙의 재정립을 통한 보험계약자 보호와 보험법과 보험업에 대한 연구 및 실무역량 강화라는 점에서도 교훈을 주는 판결이다.
최승재 < 세종대 법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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