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제시한 구조조정 방향은 △선제적 부실 예방에 초점을 두고 △국책은행이 아니라 시장 중심으로 공적 자금 투입을 최소화하며 △산업과 금융논리를 균형 있게 반영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또 고용과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거나 산업 전반이 구조적 부진에 직면한 경우는 금융논리보다 산업논리를 좀 더 고려하기로 했다. 2016년 해운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논리를 우선해 한진해운을 법정관리로 보낸 결과 해운업 경쟁력이 훼손되고 혼란이 초래됐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일 대우조선해양 거제조선소를 방문해 “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조선업 혁신성장 방안’을 올 1분기 중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한국 조선업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시장에서 1위를 거의 놓치지 않았고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잠시 실적이 좋지 않다고 곧바로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은 ‘제 살을 깎아먹는 우’를 범하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조선사 하나가 협력사 직원까지 포함해 수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무작정 금융논리만으로 구조조정하기는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다 고려하다 보면 구조조정이 제대로 안 될 것이란 반론도 많다. 이렇게 되면 결국 ‘혈세를 투입해 부실기업을 살리겠다는 얘기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 찬반 의견을 들어봤다.
[찬성] 금융논리만으로 구조조정하면 산업생태계 붕괴될 수 있어
국내 산업역량 스스로 깎아먹는 정책 펴선 안돼
정부는 지난해 12월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향후 기업 구조조정을 금융논리의 재무적 측면과 산업적 측면을 함께 고려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학생들 취업을 신경 써야 하는 조선 관련 학과 교수로서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진작 산업적인 측면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중소형 조선산업군이 거의 붕괴된 지금에 와서야 추진하는지 아쉬울 뿐이다.
그동안 국내 조선업은 생산량의 90% 이상을 수출하는 주력 수출 산업으로서 무역수지 흑자의 효자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우리 조선산업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조선시장에서 30~40%의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뛰어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수주절벽’은 국제경쟁력 약화보다는 글로벌 조선시장의 지속적인 불황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
조선업의 산업적 특성과 우리나라의 국가적 특성을 감안하면 향후에도 조선업은 주력 수출 산업으로서 효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바다가 있는 한 선박 수요는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고 누군가는 선박을 건조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후 및 지리적으로 선박 건조에 적절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이뤄진 데다 기후변화가 적고 적당한 위도에 있어 작업환경 구축에 유리하다.
2000년대 이후 국내 조선산업은 설계기술, 생산공정기술 등 전반적인 기술 경쟁력 측면에서 중국과 일본을 압도해왔다. 물론 최근 중국이 막대한 정부 지원과 저임금을 바탕으로 가격경쟁력을 끌어올렸으나 여전히 고부가가치 선종의 기술력 측면에서는 다소 열위에 있다. 일본은 유리한 환율과 커다란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우리와 주력 선종에서 경쟁하고 있으나 환율 변동, 인력 부족에 따른 설계 및 생산 대처능력 등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 국가는 물량 확보가 어려울 땐 풍부한 내수로 산업을 지탱한다. 반면 우리는 한진해운 등 영업 중인 해운업체마저 정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중국은 국영기업 형태로 조선소와 해운업체 등을 운영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특정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적절한 산업생태계 유지가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상당수 중소형 조선소가 도산 또는 폐업했고 STX조선해양, 성동조선 등 중견 조선소 처리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만약 산업 규모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이 지속되는 경우 우리 조선업의 산업생태계가 붕괴해 많은 문제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산업 규모의 축소는 우선 조선기자재산업 위축을 유발할 것이며 이는 기자재의 해외 의존도 확대, 원가 상승 등 측면에서 조선업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노동시장에서 조선소 관련 설계인력, 생산공정인력이 자연스럽게 순환되고 수급이 유지됐는데 이 또한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 산업생태계가 전반적으로 부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산업적 측면을 고려해 조선소 규모별로 적절한 숫자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해외 전문기관에선 2019년부터 세계 조선시장이 나아질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국제해사기구(IMO)는 배기가스를 비롯한 해양환경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액화천연가스(LNG) 연료추진선을 비롯한 친환경 선박에 대한 수요가 커진 상황이다. 경쟁국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지도록 국내 산업역량을 스스로 깎아먹는 정책보다는 이런 뉴노멀 시대에 부응해 산업역량을 강화하고 생태계를 고도화할 수 있는 산업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반대] 노조·지역주민·정치인들이 구조조정에 저항할 명분만 제공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 제도화가 근본적 해법
우리나라는 시장에 의한 산업의 구조조정 능력 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라는 타율적 개혁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파생된 대우조선해양은 천문학적인 분식회계라는 기업 범죄를 저지르고 국가경제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분식회계와 과도한 차입 경영을 가져왔고 해체의 비운을 맞이한 대우그룹의 자회사(대우조선)가 산업은행이라는 공기업 관리하에서 ‘황제경영’의 문제라던 천문학적 분식회계를 자행했다. 경영권이 확고한 경쟁회사들은 흑자 전환하고 있는 반면 대우조선은 여전히 부실기업으로 공적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외환위기 때 발생한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20년이 지나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주인 없는 기업으로 표류하게 만든 결과 국민이 막대한 비용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 원칙’을 발표했다. 가급적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 사후적 처방이 아니라 선제적 대응을 강화하겠다는 것, 금융논리뿐만 아니라 산업적 측면도 고려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산업적 측면을 고려하겠다는 선언은 최근 한진해운의 구조조정 트라우마 때문이다. 한진해운 청산 과정에서 막대한 산업적 피해가 발생했고 물류산업의 생태계가 와해돼 수출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정부의 새로운 ‘원칙’은 표면적으로 타당해 보이지만 사실은 모순투성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시장에 맡긴다는 원칙이 있다면 선제적으로 하거나, 산업적 측면을 고려한다는 원칙을 정부가 선언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진짜 문제는 ‘가급적’이라는 단서 조항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부실화 과정을 보면 예외없이 정치화하고 있다. 외환위기 직전에 부실화한 기아자동차에 대해 정치인들은 앞다퉈 국민기업을 지키겠다는 무책임한 공언을 했고, 노동계는 물론 일부 종교계까지도 구조조정의 정치화에 가담했다. 지난 총선에서도 정치인들은 조선 업체들을 방문해 같은 약속을 했다.
한진해운의 ‘무질서한’ 구조조정 배경은 과거 구조조정을 논의하는 정책 책임자들의 모임을 ‘서별관회의’라는 이름 아래 정치화하고 공격한 것이다. 즉 정부가 구조조정의 주체가 되고 공적자금이 구조조정의 수단이 되는 한 대규모 구조조정은 ‘가급적’ 시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예외없이 정치화하고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적 구조조정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산업적 측면을 고려한다는 원칙도 정치권, 노조 등 이해 당사자나 ‘표(票)퓰리즘’에 뼛속까지 젖어 있는 정치인들이 구조조정에 저항할 명분만 제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새로운 원칙은 표면적 명분과는 달리 관치 경제와 정치적 구조조정의 계속 선언이나 다를 바 없다. 주인 아닌 자가 주인 행세를 하는 경우 도덕적 해이를 부른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정부에 의한 구조조정 또한 이 경우다.
근본적인 대책은 구조조정을 시장이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선진화하고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경제를 독립시키는 것이다. 그 해법은 관치금융이 아니라 구조조정이 가능한 투자은행 등 금융산업의 자율화와 전문화를 서두르는 것이다. 최근 구조조정 과정에서 사모펀드에 의해 인수된 기업들의 성과와 20년이 지나도 주인을 찾아주지 못하는 정부의 구조조정 결과를 대비해 보면 답은 명확하다. 지금 정부가 선언할 것은 모순투성이의 가짜 원칙이 아니라 정부가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원칙과 로드맵이다. 많은 산업의 부실화와 4차 산업혁명으로 경제 구조 변화가 본격화되는 지금 더 늦출 수 없는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오형주/박신영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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