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18년간 한국은 실패, 중국은 성공
'2차 벤처붐' 일으키려면 2000년 창업 생태계 복원 절실
2000년 한국, 정부 지원 아닌
제도 혁신으로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벤처 생태계 구축
2001년 'IT버블' 붕괴로 규제 늪 빠져
벤처 빙하기속 1차 벤처붐 시대 이끈 기업들 굳건히 성장 … 총매출 350조원
코스닥 운영주체 독립·스톡옵션 부활… 혁신적 벤처 나올 인프라 구축해야
한국경제신문의 ‘혁신의 중국, 질주하는 선전’ 기획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벤처생태계 혁신이 가야 할 길을 봤다. 중국은 2000년 한국의 벤처생태계를 벤치마킹해 갔다. 그 이후 한국의 벤처생태계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했다. ‘2차 벤처붐’은 ‘1차 벤처붐’의 성장과 쇠락의 역사를 배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다른 나라 제도는 접목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의 다른 도시들도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 성공한 제도가 한국의 몸에 맞는 옷이다. 그렇다면 지난 18년간 벤처기업 육성에서 왜 한국은 실패하고 중국은 성공했는가를 살펴보자.
1995년 출범한 벤처기업협회가 주도한 제1차 벤처붐은 정부 지원이 아니라 제도 혁신으로 이뤄졌다. 정부의 자금 지원은 거의 없었다. 지난 정부와 현 정부가 창업 활성화 정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2000년대 초 한국은 미국을 제외한 세계 최고 벤처생태계를 조성했다. 벤처기업협회가 주도해 제정한 세계 최초의 벤처기업특별법과 일본 홍콩을 앞선 금융 신시장인 코스닥이 견인차였다. 연간 약 180개 벤처기업이 상장했고, 벤처 투자는 2조원을 넘었다. 창업 기업 및 상장 기업 수와 벤처 투자 금액에서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 1위였다. 그리고 벤처기업인은 ‘신랑감 1위’로 꼽혔다.
2000년 한·이스라엘 벤처 포럼에서 이스라엘의 벤처인들은 한국의 벤처기업특별법과 코스닥을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당시 한국과 이스라엘의 벤처 생태계는 엄청난 격차로 한국이 앞서 있었다. 이원재 요즈마그룹 한국지사장은 2013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믿기 어렵겠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이스라엘은 한국의 벤처 환경을 부러워했다. 당시 한국에는 1만 개가 넘는 벤처기업이 쏟아져나오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벤처기업 수는 총 1000개에 불과한 반면 한국에서는 한 해에 3000개가 넘는 벤처기업 창업이 일어났다.
2001년 세계적으로 정보기술(IT) 거품이 붕괴했다. 미국의 나스닥과 함께 한국의 코스닥도 동반 폭락했다. 세계적인 닷컴 신경제의 붕괴 현상이었다. 한국에서는 ‘묻지마 투자’ ‘무늬만 벤처’ 등 국내 문제로 오인해 ‘벤처 건전화 정책’이란 벤처 규제 정책을 쏟아냈다. 대표적 정책이 △코스닥과 코스피 운영 조직의 합병 △벤처 인증제의 보수화 △스톡옵션제의 보수화 △기술거래소 통폐합이다. 이런 규제 정책의 결과 나스닥이 원상 회복하는 동안 코스닥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한국은 고(故) 피터 드러커 교수가 인정한 ‘세계 최고의 기업가정신 국가’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의 기업가정신 국가로 전락했다.
벤처 빙하기 속에서도 2001년 이전 1차 벤처붐 시대 벤처들은 굳건히 성장했다. 이들 벤처의 총매출은 삼성전자보다 많은 350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벤처기업 실태 조사에 의하면 이들은 연평균 15% 이상 성장하고 있다.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로 따지면 1%가 넘는다. 이미순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의 연구(2017년)에 따르면 1차 벤처붐 기업의 10년 생존율은 46.8%로 일반기업(17.9%)보다 훨씬 높다. 전체 상장 기업의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2%에서 8.3%로 증가했다. 성장과 고용의 유일한 대안인 벤처는 ‘거품’이 아니라 ‘기적’이었던 것이다.
코스닥은 벤처 투자와 회수의 선순환 고리다. 2005년 1월 유가증권시장을 운영하는 한국증권거래소와 코스닥시장을 운영하는 (주)코스닥증권시장이 통합되면서 운영은 보수화됐다. 코스닥 상장 규모가 5분의 1 이하로 줄고, 상장 소요 기간이 7년에서 14년으로 늘어나면서 벤처 투자 규모가 축소되고 초기 민간 투자는 사라지게 됐다. 코스닥의 활성화 없는 벤처 활성화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코스닥 활성화의 핵심은 코스피와는 다른 고위험·고수익 시장으로의 복귀다. 이를 위해선 코스피와 코스닥 운영 주체를 분리해야 한다.
벤처 인증제는 ‘무늬만 벤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망하지 않을 기업을 선정하는 기준인 보증 위주로 전환됐다. 보증은 벤처가 지닌 고위험·고수익 특성과 반대의 속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초기 기술 벤처들의 벤처 인증이 어려워지면서 벤처 생태계는 보수화됐다. 연구개발 실적 기준의 단순한 인증제도인 초기 벤처 인증제로 복귀해야 한다.
스톡옵션은 벤처기업에 인재 영입의 유일한 수단이다. 실리콘밸리의 인재가 벤처로 가는 이유다. 스톡옵션과 시가의 차액을 기업의 손실로 반영하는 회계기준이 시행되면서 스톡옵션 제도는 인재 영입의 역할을 상실하게 됐다. 문제는 국제회계기준(IFRS)이 아니라 정책 당국의 의지다.
기술거래소는 벤처와 대기업의 인수합병(M&A)을 위한 세계 최초의 민관합동기관이었다. 벤처는 시장을, 대기업은 혁신을, 투자자는 회수시장을 얻는 M&A가 한국 경제 생태계에서 빠진 연결고리다. M&A를 이끌 민간 주도의 거래 시장이 필요하다. 2차 벤처붐의 전제조건은 초기 벤처 생태계 복원이다. 여기에 신용불량의 공포를 없애는 재도전 정책을 더하는 것이 순서다.
이민화 <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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