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는 “중국은 못 믿는다”, “이제 중국에 대한 환상은 버려야 한다”, “중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한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경제학 용어 중에 ‘정보 폭포(information cascade) 현상’이 있다. 대다수가 독립적인 판단 없이 서로의 행동을 따라할 경우, 집단이 크다고 해서 그들의 정보가 꼭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에 대한 분석은 늘 ‘균형’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 우리에게 너무도 어렵게 변한 현장도 있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도 많이 있다. 생선에 가시가 있으면 가시를 발라내야지 통째로 버릴 일은 아니다. 일부 중국전문가의 “웬만하면 하지 말라”는 대책은 어이가 없다. 한 번도 싸워 본 적 없는 장수가 무패(無敗)의 장수인 것은 맞다. 하지만 전장(戰場)에 나서 보지도 않은 무패의 장수는 의미가 없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隔岸觀火(격안관화: 강 건너 불구경하다)식의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 중국과 신뢰 속에서 상생(相生)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정이 메마른 중국사회?
중국 사람들도 중국 국내에서의 사업을 힘들어 한다. 관시도 예전 같지 않다(관시가 없어졌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관시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결과가 흥미롭다. 혁명세대는 관시 사용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관시를 만들기가 어렵다. “人情薄如紙(인정박여지: 인정이 종잇장처럼 얇다)”라며 세태가 각박함을 탓한다. “人走茶凉(인주다량: 사람이 떠나면 차가 식는다)”이라며 은퇴하면 서럽다는 푸념들을 한다. 하지만 중국은 ‘인정(人情)사회’의 전통이 있다. 아직도 따뜻한 인정과 의리를 중시하고 또 이를 통해 좋은 관시를 맺어간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의리를 지키냐”는 중국인의 말을 듣고 “중국도 우리랑 똑같네”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것은 바로 ‘예전에 비해서’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첫 직장에서 나올 때 중국 친구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중 한 중국 친구는 내게 “공부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사무실을 내줬다. 이 덕분에 퇴사 후 어려웠던 유학생활에 큰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도 비즈니스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대해 주느냐”는 질문에, “친구니까”라고 웃으며 짧게 답한 그는 정말 ‘의리의 화신’처럼 보였다. 최근 중국인들을 못 믿겠다는 말을 자주 들을 때마다 雪中送炭(설중송탄: 추운 겨울에 땔감을 보내주다·어려울 때 돕다)한 이 친구를 떠올리곤 한다.
아직 소중한 덕목 '관시'
다른 사례도 있다. 한때 중국과 투자 관련 협상을 책임진 A사장이 중국 본사 대표로 내정됐다. 그는 베이징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과거 인맥 중 은퇴한 관리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이는 중국인들에게도 매우 뜻밖이어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은퇴한 선배님들을) 우리도 요즘은 잘 못 챙겼는데, 고맙다. 우리 부서를 대표해서 고마움을 전한다”며 A사장, 나아가서 S그룹, 심지어 한국 국민 모두 의리가 있다며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요즘 누가 의리를 따지느냐”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지만, 반면에 의리를 지키는 상대방이라면 그를 매우 존중한다.
관시를 중시하고 인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중국의 전통사상도 글로벌 환경에 영향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속도와 방향에 대한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다. 중국인들은 ‘의리 있는 친구’의 부탁과 아쉬울 때만 찾아오는 ‘그냥 아는 이’의 부탁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A사장이 중국 대표 시절 S그룹이 중국에서 전성기를 보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의리? 관시? 그게 언제 적 얘기냐”고 어느 후배가 따지고 든 적이 있다. 개그를 흉내 내서 농담 삼아 이렇게 대답했다. “중국 사람들하고 그런 거 해 봤니? 안 해 봤으면 말하지 마!” 의리를 지키고 좋은 관시를 맺는 것은 분명 예전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들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직은 중국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덕목이다.
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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