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입불상 등 1000점 출토
[ 서화동 기자 ]
경북 경주의 동쪽 지역인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 해발 100m의 야트막한 산이 있다. 낭산(狼山)이다. 동네 뒷산 같지만 옛 신라인에게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실성왕은 이곳에 하늘의 신령들이 내려와 노닌다고 하여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다. 413년의 일이었다. 낭산 일대에 선덕왕릉,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보물 제 665호),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최치원의 고택이 있던 독서당 등이 몰려 있는 이유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낭산 일대가 사적 제163호로 지정된 이유다.
신라의 왕실사찰로 추정돼온 낭산 황복사 터에서 웅장하고 화려했던 옛 면모를 보여주는 유적과 유물이 무더기로 확인됐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8월부터 낭산 일원을 발굴조사한 결과 기다란 돌로 기단을 조성한 대형 건물지와 십이지신상을 새긴 건물지 등 다양한 건물지와 금동입불상을 비롯한 유물 1000여 점이 출토됐다고 31일 밝혔다.
황복사가 신라의 왕실사찰로 추정되는 것은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했을 때 나온 금동사리함 뚜껑에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글자가 확인돼서다. 이는 죽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사찰이라는 뜻. 당시 이 탑의 옥개석에서 발견된 금제여래입상과 금제여래좌상은 국보 제80호와 제79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이번에는 삼층석탑에서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작지를 발굴한 결과 통일신라 시대의 왕실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 유구가 확인됐다. 정교하게 가공한 큰 돌로 조성한 대형 건물의 기단과 회랑, 담장, 배수로, 도로, 연못 등의 터가 한꺼번에 드러나 당시 사찰의 규모와 건물배치를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왕실사찰의 위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남북 길이 57.5m, 동서 길이 17.5m의 대석단 기단이 있는 건물터다. 남쪽벽과 동쪽벽에는 길이 150㎝, 높이 47㎝, 폭 50㎝ 안팎의 잘 다듬은 장대석(長大石)을 1~4단으로 쌓았고, 북쪽에는 폭 20~100㎝의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었다. 건물 전면 중앙부의 북쪽에서는 돌계단도 발견됐다. 또 건물 내부에 회랑을 둘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발굴 책임을 맡은 김희철 성림문화재연구원 조사부장은 “건물 내부에 회랑을 두른 독특한 구조는 경주 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은 가람배치 방식”이라며 “종묘와 같은 특수한 용도의 건물이거나 황복사의 중심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토끼·뱀·말·양 등 십이지신을 기단에 조각한 건물터도 발굴됐다. 십이지신상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노세 우시조(1889∼1954)가 발굴한 뒤 도로 땅에 묻혔다가 9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출토된 유물은 금동입불상과 보살입상, 신장상(神將像), 치미(장식기와)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기와 기와다. 조사단은 이들 유물로 볼 때 황복사의 가람배치와 건축의 격조가 상당히 높았으며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사찰이 유지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건물배치와 도로를 통해 낭산 동쪽인 지금의 보문동 지역이 바둑판 모양으로 설계한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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