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의지 없는 기업과 무턱댄 무역 규제 탓
삼성·LG 세탁기 세이프가드 적용, 결국 부메랑 될 것"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삼성·LG 세탁기에 세이프가드를 발동키로 했다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발표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노래가 있다.
“우리는 앨런타운에 삽니다. 공장이 죄다 문을 닫고 있어요.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있고요….”
제철소의 굉음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빌리 조엘의 ‘앨런타운(Allentown)’이다. 미국 2위 제철소였던 베들레헴스틸의 몰락과 인접 도시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의 우울한 삶을 그린 노래다. 소위 ‘러스트 벨트(rust belt)’의 미국인이라면 ‘힘들지만 그래도 여기 살리라’는 후렴구에 고개를 절로 끄덕인다는 올드 팝이다.
이 노래가 발표된 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이다. 베들레헴스틸 등 철강업계가 밀려드는 수입품 탓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칠 때다. 베들레헴스틸이 수입 제재를 요청했고, 정부는 수출국에 자율수출규제(VER)를 강요했다. 그때 핵심 인물이 당시 USTR 부대표였던 라이트하이저다.
그가 밀어붙인 VER의 결과는 어땠을까. 베들레헴스틸은 이 세상에 없다. 제철소 터에는 카지노가 들어섰다. 앨런타운도 간판 떨어진 도시가 됐다. 무역제재 수혜 기업은 망하고 지역 사회는 황폐화된 것이다.
경영컨설턴트 짐 콜린스는 저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에서 수입 철강이 베들레헴스틸의 몰락에 미친 영향은 전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베들레헴스틸의 최고경영자(CEO)가 수입 철강 투정을 부릴 때, 또 다른 철강사 뉴코어의 CEO는 오히려 수입품의 도전을 축복으로 여기고 경영 혁신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며 극찬했다. 취약한 경쟁력을 수입 제품에 전가한 회사와 노조, 산업을 과보호한 정부가 철강산업을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 탓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철강 제품을 써야 했다. 연간 200억달러가 주변 산업과 소비자에게 전가됐다고 한다. 무역제재 비용이다.
미국이 1980년대 이렇게 VER을 강요한 업종은 한둘이 아니다. 일본산 자동차도 그런 경우다. 크라이슬러가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다. 일본은 연간 168만 대 이상은 수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VER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했다.
그 결과도 다르지 않다. 일본은 대수 규제를 피하며 수출액을 늘리기 위해 고급승용차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도요타 렉서스, 혼다 아큐라, 닛산 인피니티 등 고급차 디비전이 그때 탄생했다. 미국 고급차 시장이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이 고급차 시장으로 올라간 틈을 타 현대자동차가 1986년 소형차로 미국 시장에 처음 진출했다. 첫해 판매량이 16만 대를 넘었으니 무혈입성이나 다름없었다. 미국 메이커들은 넛크래커에 낀 호두 신세가 돼 버렸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VER이 해제된 뒤는 말할 것도 없다. 그 결과가 10여 년 뒤 GM 파산과 크라이슬러 매각이다. 근로자들의 일자리는 물론이다. 자동차 가격이 일제히 올라 소비자들이 피해를 봐야 했다. 디트로이트는 앨런타운 못지않은 러스트 벨트의 대표 도시가 됐다.
트럼프와 라이트하이저는 자유무역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유무역은 공정무역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결과의 공정일 뿐이다. 결과를 놓고 협상하는 태도는 관리무역으로 이어진다. 이번 세이프가드도 그런 경우다.
미국은 자유무역을 주도했을 때 전성기를 구가했다. 1930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일자리를 만들겠다며 관세를 400%나 인상한 ‘스무트-홀리법’은 대공황을 심화시켜 미국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반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은 국가 간 무역마찰이 세계대전과 같은 정치적 위기를 초래한다며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이끌어 미국이 경제대국의 기반을 다지는 초석을 놓았다. 후버 대통령과 스무트·홀리 두 의원은 미국 최악의 정치인으로 이름을 남겼지만 헐은 세계 무역과 유엔 출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삼성·LG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는 결국 문제를 제기한 월풀과 지역 사회, 미국 국민 모두에 부메랑이 될 뿐이다. ‘러스트 벨트 팔이’에 나선 트럼프와 라이트하이저가 앨런타운 노래를 다시 들으며 진정 미국 제조업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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