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인이 농촌에서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하는 건 쉽지 않다. 세세한 지역 정보를 얻기 힘든 상황에서 처음부터 좋은 땅을 구하기도 힘들다. 어렵게 땅과 농기계를 구해 농사를 짓는다 해도 초기 2~3년 동안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자를 내는 경우가 많다.
조하연 펀치볼산채마을 대표(58)는 귀농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조건들을 여럿 떠안은 채 2005년 강원 양구군 해안면으로 귀농했다. 충남 부여군이 고향인 조 대표에게 양구군은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타향이었다. 가족들의 귀농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 사업에서 실패한 그는 홀로 양구군으로 향했다.
양구군에 정착한 지 13년이 지난 현재, 그는 연 15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리는 영농조합법인을 이끌고 있다. 3000평(약 9900㎡) 규모로 시작한 그의 개인 농장도 그 사이 3만평(약 9만9000여㎡)으로 10배 커졌다. 비결이 뭘까. 귀농을 고민하는 이들을 대신해 FARM이 조 대표를 인터뷰 했다.
양구군은 최근 몇 년 새 시래기 주산지로 떠오른 곳이다. 무의 줄기(무청)를 겨우내 말렸다가 푹 삶아낸 시래기는 무를 키우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만들수 있다. 그러나 양구군이 시래기를 지역 특산품으로 내세울 수 있게된 건 해안면에서 나오는 ‘펀치볼 시래기’의 명성 덕분이다. 펀치볼 시래기가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해안면이 속한 양구군이 시래기 주산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
펀치볼은 해안면에 붙여진 별명이다. 6·25 전쟁 당시 전선을 취재하던 외국 종군기자가 산에서 내려다본 해안면의 지형이 화채 그릇(Punch Bowl) 같다고 해서 붙인 별칭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펀치볼 같은 이 곳 해안면에서 작년 11월 기준 전체 농가의 약 80%인 250가구가 시래기 농사를 짓고 있다. 조 대표도 이곳에서 시래기 농사와 가공을 하고 있다. 펀치볼 시래기가 인기를 얻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 대표는 “2013년 처음 홈쇼핑에 나갔을 때만해도 진짜 시래기가 홈쇼핑에서 팔릴까 나조차 의심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요리할 때마다 그때 그때 먹을 수 있게 시래기를 소량으로 포장해서 팔고 가공식품을 개발한 게 펀치볼 시래기를 알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가 해안면에 첫발을 들인 2005년만 해도 이곳은 시래기보단 감자와 일반 무를 주로 키우던 곳이었다. 시래기는 그저 무를 키우면 생기는 부산물 정도로 여겨졌다. 조 대표 역시 귀농 후 2년간은 주변 농민들처럼 감자와 일반 무를 키웠다. 귀농 자금이 넉넉하지 못한 탓에 3000평 땅을 빌려 농장을 차렸다.
그가 시래기의 수익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시래기 농사에 뛰어든 건 어느 정도 농사일에 익숙해졌을 무렵인 2007년이다. 남의 땅을 빌려 작은 규모로 농사를 짓던 그에게 시래기는 토지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작물이었다. 8월 초까지는 감자 농사를 지은 뒤 8월 중순에 무를 심어 10월 말 정도에 시래기만 수확하면 이모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민간인통제구역에 자리 잡은 해안면의 겨울은 11월부터 시작된다. 남쪽 지역에선 한창 무를 수확하는 11월이지만 해안면에서 그때까지 무를 밭에 놔두면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이모작으로 농사짓기 위해선 무의 몸통은 포기하고 시래기만 잘라내는 수밖에 없다.
“무를 밭에서 키우면 다 자랄 때까지 90일 정도가 걸려요. 그런데 시래기는 무를 심고 50~60일만 지나도 수확할 수 있어요. 11월이 되면 해안면에서는 추워서 아예 농사를 못 짓는데 시래기는 그전에 이미 다 자라서 10월 말이면 수확할 수 있는 겁니다. 무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시래기 농사를 짓기로 한 거죠. 이제 해안면 사람들을 농사지을 때 무가 잘 나오는 종자가 아니라 무청이 잘 자라는 종자를 갖다 써요.”
시래기 농사로 수익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조 대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2007년 주변 농민 4명과 함께 영농조합법인 펀치볼산채마을을 설립하고 대표를 맡았다. 농사를 잘 몰랐던 그가 법인 대표를 맡은 건 그의 경영· 재무·회계 등 사업 관련 지식과 경험 때문이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그는 2000년대 초반 수년간 중국 칭다오에서 봉제 인형 공장을 운영했다. 본인 사업체를 차리기 전에는 줄곧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중국에서 스포츠용품을 수입하는 일을 했다.
영농조합의 시래기 생산·가공 사업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은 건 2013년부터다. 그전에도 건시래기와 삶은 시래기를 수도권 학교 급식에 납품하는 등 조합의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유통업체를 통해 납품하는 방식이어서 수익이 많지는 않았다. 수익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소비자와 직거래할 수 있는 유통채널을 만드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2013년 대형 홈쇼핑 방송을 통해 시래기를 판매한 것이 매출과 수익을 모두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조 대표는 “홈쇼핑 MD(상품기획자)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잘 팔릴까 하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걱정이 큰 만큼 방송 데뷔 준비는 더 철저하게 했다. 일반 가정집에서 시래기를 사다 요리할 때 겪는 불편함은 두 가지였다. 첫째 말린 시래기를 삶아서 다시 씻어내야 하는 번거로움이었다. 둘째 시래기를 적은 용량으로 나눠 포장해 파는 곳이 많지 않아 사온 시래기를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 구성원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 하고 있었다.
조 대표는 농민 동료들과 함께 소비자들이 좀 더 편하게 시래기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소비자가 간편하게 요리해 먹을 수 있게 소용량으로 나눠 담는 방법을 고안했다. 4인 가족이 한 번 국을 끓여 먹을 수 있는 분량인 200g으로 포장하고 15개를 묶어 한 세트로 만들었다.
첫 홈쇼핑 데뷔는 성공이었다. 방송을 위해 준비한 6500세트가 모두 팔렸다. 한 세트당 가격이 4만 원 가량이었으니 방송 한 번으로 2억60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홈쇼핑 업체에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가 만만치 않았지만 농촌 영농조합으로선 깜짝 놀랄만한 매출이었다. 펀치볼이라는 지명이 주는 친환경적인 느낌과 소비자의 편의를 고려한 상품 포장 방법 덕분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맞벌이 부부와 1·2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집에서 직접 밥과 요리를 해먹는 가구가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말린 시래기를 사다가 삶아서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무쳐먹는 소비자들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게 가공식품 개발이었다. 시래기를 활용한 즉석식품 레시피를 개발해 상품을 시장에 내놓으면 농민들로선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2015년 말 펀치볼시래기 가공·유통협의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은 조 대표는 양구군의 지원을 받아 여러 즉석식품을 개발했다. 시래기를 넣은 순대, 고등어조림, 만두, 떡갈비 등이다. 2016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에 3t 물량의 시래기를 수출하는 성과도 거뒀다.
사업에 실패한 뒤 갑작스레 결심하게 된 조 대표의 귀농. 자금도 부족했고 귀농 계획도 치밀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이 꼽는 실패 확률이 높은 귀농의 전형적인 사례다.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 스스로도 “농사일로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기 시작한 건 귀농하고 7년 이상 지난 2013년께부터”라고 말한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그가 귀농 준비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우선 귀농 하기 전에 땅과 집을 사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해당 지역에 내려가 생활해보는 게 필요합니다. 월세 등을 얻어 주변 농가들의 일을 도우면서 진짜 농촌에서 산다는 게 뭔지 알고 준비할 필요가 있어요. 농촌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꼭 믿음직한 멘토를 만들라고 하고 싶어요. 귀농을 준비할 때 뿐만 아니라 내려와서 농사를 지을 때도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해요. 진정한 멘토가 있다고 하면 어려움이 훨씬 줄어들 수 있어요. 제가 방금 말한 세 가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귀농했다가 5년 넘게 고생했어요. 농사로 돈을 못 버니까 5년 동안은 계속 빚으로 생활했던 거 같아요.”
FARM 홍선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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