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민원에… 첨단빌딩도 화재경보기 'OFF'

입력 2018-02-02 17:39  

허술한 화재경보 관리

서울 대형빌딩 180곳 중 30곳 화재경보장치 끈 채 영업
작년 동탄 주상복합 화재사건, 경보기 끄고 공사하다 피해 키워

안전은 공짜가 아니다
소방관 확충·스프링클러 의무화… 안전 위해 비용 지출은 필수
시민들도 경보 오작동 따른 불편 기꺼이 감수할 의지 있어야



[ 황정환 기자 ]
1일 서울 여의도의 한 대형빌딩 지하 아케이드몰. 점심·저녁시간은 식사를 하려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이곳은 여의도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신축빌딩이다. 그만큼 화재에 대비한 안전시설도 비교적 잘 갖춰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염이나 연기를 감지하는 센서와 비상 상황 시 물을 스스로 분사하는 스프링클러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불이 나면 건물 전체에 경보음이 울리고 자동으로 119 신고가 이뤄지는 ‘화재 수신반’도 운영 중이다. 수신반이 설치된 빌딩 관리실을 찾았다. 예상과 달리 수신반의 전원 스위치는 아예 꺼져 있었다. 빌딩 관리업체 관계자는 “‘경보 오작동으로 손님들이 다 나가면 매상을 책임질 거냐’며 항의하는 점포들의 등쌀에 점심·저녁시간에는 수신반을 꺼놓고 있다”고 해명했다.

최근 제천 밀양 등 대형 화재 사건이 잇따른 가운데 서울시내 대형빌딩들조차 입주사 민원을 이유로 화재 수신반의 전원을 내리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내부 공사 등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화재 수신반을 임의로 끄는 것은 불법이다. ‘돈의 논리’를 앞세운 점포들의 항의 때문에 시민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화재경보 ‘정상관리’ 빌딩은 단 8%

한 빌딩관리업체에 따르면 서울시내 대형빌딩 180곳 가운데 화재 수신반을 꺼놓는 곳이 16.7%(30곳)에 달한다. 음식 조리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연기를 화재로 오인해 경보가 울리는 사례가 나올 때마다 “매출이 줄어든다”며 항의하는 민원이 쏟아지고 있어서다.

화재 수신반은 실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인명 피해를 막는 핵심 소방 설비다. 한국화재보험협회에 따르면 다수의 사람이 근무 또는 거주하는 ‘특수건물’ 2만7621곳 가운데 화재 수신반이 설치된 비율은 99%(2016년 기준)에 달한다.

그러나 수신반이 제대로 운영되는 곳은 드물다. 수신반 등 화재경보장치가 양호 판정을 받은 비율은 59.9%에 그쳤다. 소화설비(92.8%) 소화활동설비(98.4%) 등 다른 방화설비에 비해 크게 낮은 수치다. 특히 관리자 운영 실태 및 교육 상태 등을 평가한 ‘안전관리’ 양호율은 8%에 불과했다.

지난해 2월 58명의 사상자를 낸 경기 화성시 동탄의 주상복합 메타폴리스 화재 사건도 주민 민원에 시달리다 못한 관리업체 측이 화재 수신반 전원을 끈 채 내부 공사를 하다 피해를 키웠다. 서울 금천구의 한 대형 아파트 단지도 마찬가지다. 이곳 관리인은 “밤중엔 수신반을 끄고 육안으로만 확인한다”며 “순찰 나간 사이에 오작동이 나 주민이 다 깨면 결국 책임은 나한테 돌아온다”고 말했다.

“안전 위해 지갑 열 준비 돼야”

국회는 밀양 화재 참사 발생 나흘 만인 지난달 31일 1년간 묵혀놨던 소방 관련 법안 3개를 부랴부랴 통과시켰다. 정부는 그동안 관행적으로 해온 소방특별조사를 불시 단속으로 전환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2012년 소방인력 부족과 민관 유착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소방 점검 권한을 민간에 대폭 이양했던 것과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정부는 당시 민간이 책임의식을 갖고 시설 안전만큼은 스스로 지킬 것이란 기대를 바탕으로 관 주도의 소방 단속을 줄이고 자체 점검해 당국에 보고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기대가 무참히 깨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작년 말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무작위로 선정한 시내 15개 호텔을 불시 단속한 결과 4곳에서 수신반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들 4곳 모두 자체 점검에서는 ‘문제없음’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에 회의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안전을 높이기 위한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건물 외벽의 불연재 시공 의무화와 스프링클러 설치 기준 강화 등으로 인한 건축·관리비 상승은 필연적이다. 이들 비용은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 단속 강화도 법에 따른 최소 기준보다 1만9000명 부족한 소방 인력을 확충하지 않고서는 실효성이 떨어진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안전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며 “과연 우리 국민이 이를 위해 스스럼없이 지갑을 열 준비가 돼 있는지, 간혹 발생하는 경보 오작동에 따른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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