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걷는 도시의 즐거움

입력 2018-02-05 18:27  

김봉렬 <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이탈리아 밀라노는 기원전 3세기에 이미 남부 알프스 지역의 강력한 로마 도시였다. 2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답게 관광객으로 가득한 구도심이 있다. 패션과 가구의 국제적인 중심지답게 고층 건물로 밀집된 신도심도 있다. 인구와 시설물 밀도는 어마어마하게 높아졌지만, 도로나 공원 같은 하부시설은 중세 때보다 별반 늘어나지 않았다. 좁은 옛 마차 길을 사람과 자동차, 그리고 전차와 자전거까지 공용하니 혼잡과 소음이 말할 수 없었다. 찬란한 과거의 성취와 비교해 보잘것없는 현재를 유지하던 대표적인 도시였다.

2015년 밀라노 엑스포를 계기로 이 도시는 대대적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포르타 누오바(새 문) 재생계획’이 그 대표적인 시도다. 롬바르디아 주청사부터 가리발디역을 거쳐 포르타 누오바까지 잇는 여러 지역을 ‘시민이 생활할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계획이다. 계획의 원칙으로 첫째 지속 가능한 개발, 둘째 새로운 공공 공간 확충, 셋째 도시 내 녹색 자연 확보 등을 내세웠다.

핵심 사업은 쾌적하고 조용한 보행자 전용로 만들기다. 보행로와 차도를 입체적으로 분리하고, 보행로를 따라 충분한 녹지 공간을 만든다. 큰 공원을 만들고 그곳을 관통해 일상적인 지름길을 낸다. 환경 친화적이고 보행 친화적인 강력한 기준으로 건물을 통제한다. 아직 일부만 완공했지만 대부분 직장인이 이 길을 통해 걸어서 출퇴근한다.

이른바 ‘차 없는 거리’는 현대 도시의 필수 시설이 됐다.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이나 서울의 ‘서울로 7017’은 고가 철도나 차도를 보행자 전용로로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밀라노의 두오모 지구와 같이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은 대개 역사적 도심을 보행 전용지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우리도 대구의 동성로 계획처럼 성공을 거둔 보행 전용로가 등장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형성된 도심 상가의 기능을 활성화하며, 인근의 근대역사문화 거리와 연결돼 역사성까지 회복하고 있다. 서울의 덕수궁 돌담길이나 광주의 양림동 역사문화 거리도 역사적 특성을 살린 보행 우선로다. 그러나 이 길들은 일종의 관광 도로다. 주인인 주민이 소외되는 관광 공해 지역이기도 하다.

물론 그 목적이 무엇이든 일단 걷는다는 일은 호모 에렉투스의 특권이고, 보행을 즐기는 것은 현대인의 호사다. 관광용 보행로는 일회적 기호지만, 쾌적한 생활용 보행로는 매일의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새소리 들리는 공원을 걸어 출근하고, 조용히 연인과 속삭이며 퇴근할 수 있는, 그런 곳이 행복한 도시일 것이다.

brkim@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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