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들어 '전방위 활약 '
최근 '미투 운동' 촉발시킨
젠더·성범죄 직권조사 결정
사형제 폐지·양심적 병역거부 등은
찬반여론 감안땐 해결 쉽지 않아
'소모적 정쟁' 확산 우려
"인권조례는 동성애 조장"
충남도의회, 지자체 첫 폐지
지방선거 앞두고 정쟁 가능성
[ 이현진 기자 ]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약방의 감초’처럼 다양한 사회 이슈에 적극 개입하면서 문재인 정부 들어 달라진 위상과 파워를 실감케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젠더·성범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인권위는 조직 내 젠더·성범죄가 발생하면 직권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국토정보공사(LX), 군부대에 이어 지난달 말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검찰 내 젠더·성범죄 직권조사에도 나섰다. 이외에도 학교 병원 경찰 심지어 어린아이를 거부하는 식당(노키즈존)에 대한 진정까지 인권위가 다루지 않는 갈등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 같은 인권위의 전방위적인 활약이 오히려 사회적 갈등만 부추기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사형제 폐지나 양심적 병역거부, 성소수자 차별금지 등 인권위가 추진 중인 의제마다 찬반양론이 극단으로 갈리면서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소모적 정쟁만 양산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사형제 폐지 등 추진…여론은 시큰둥
인권위는 올해 중점 추진 과제로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 △혐오표현 규제 등을 선정했다. 문제는 모두 정답이 없는 철학과 가치 판단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정책으로 도입할 때 타협의 여지가 적다는 점도 뜨거운 논란을 예고한다.
인권위가 과연 이 숙제를 원만하게 풀 수 있을까. 찬반이 팽팽하게 맞서는 여론을 감안하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권위가 직접 시행한 국민의식 실태조사 결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2016년 46.1%로 나타났다. 2005년(10.2%)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수치지만 절반의 반대 여론이 엄연히 존재한다.
바른군인권연구소는 지난달 16일 헌법재판소가 심리 중인 ‘양심적 병역거부 헌법소원’과 관련해 “병역거부를 허용한다면 심각한 위기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며 “명백한 불법이자 비합리적 행위”라고 반발했다.
사형제 폐지는 반감이 극도로 높다. 작년 11월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11명 중 52.8%가 ‘사형을 실제 집행해야 한다’고 답했다. 32.6%는 ‘사형제를 유지하되 집행은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응답했다.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9.6%에 불과했다.
특히 이영학 사건,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 등으로 사형을 요구하는 국민청원도 쏟아지고 있다. 이성호 인권위원장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인권변호사 출신으로서 사형제 폐지에 적극 힘써달라”는 의견을 전달했지만 국민감정을 고려해보면 지방선거를 앞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매우 낮다.
◆갈등의 불씨 된 인권조례
충청남도의회는 지난 3일 본회의에서 ‘인권조례 폐지안’을 통과시켰다. 재적 37석 중 26석을 확보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들이 몰표를 던졌다. 인권조례 폐지안을 대표발의한 김종필 자유한국당 충남도의원은 “동성애를 조장하는 인권조례는 폐지하는 게 옳다”며 “8만여 명의 도민들이 조례 폐지 청원을 제출했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반대 성명에서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는 국내법과 국제인권 기준에 따른 인권의 보편적 원칙”이라며 이번 충청남도 결정에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이어 “유엔 성소수자 특별보고관에게 이를 알리는 등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인권조례 폐지에 따른 인권의 후퇴를 막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방자치단체 인권조례는 인권위가 지난 몇 년간 강력 추진해온 사업 중 하나지만 종교단체 반발로 지자체들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충청남도는 모두가 하고 싶지만 도의상 아무도 못했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실행한 것”이라며 “충청남도를 계기로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인권조례안이 정치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혐오표현 확산에 대한 적극적 대응’은 인권위의 2018~2020년 특별사업이다. 규제해야 할 혐오표현의 경계를 구분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한 태스크포스(TF)도 꾸린다. 인권위 관계자는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혐오표현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규제가 필요하다”며 “교육, 정책, 제도개선 등 인권위의 모든 권한과 기능이 종합적으로 투입돼야 할 복합주제”라고 강조했다.
성별·인종·성적지향 등을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퍼지는 혐오표현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대응이지만 규제를 만드는 것은 결이 다른 문제다. 어디까지가 혐오표현인지 인권위가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가이드라인 마련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표현의 자유 등을 놓고 논란이 일 가능성도 높다.
◆“문제, 추상적 접근” 비판에 혁신모색
이처럼 인권위가 짊어진 과제는 어느 것 하나 쟁점화하는 순간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는 문제다. 인권위도 뾰족한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인권위 관계자는 “언제까지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문제”라면서도 “캠페인 등으로 긍정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향후 논쟁적인 문제를 다루는 만큼 충분한 시민 교육만이 문제를 풀 방도라는 얘기다. 이를 위해 인권위는 양적·실적 위주의 인권교육에서 벗어나 전략적인 장·단기 계획을 세울 방침이다. 형식적으로만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공청회나 간담회를 개선하기 위한 작업에도 착수했다. 인권이라는 절대가치를 추구하면서도 현실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논의의 토양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인권위가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다루면서 추상적인 계획을 내놓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인권위 혁신위원장인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권위의 정책 관련 기능을 실질적, 내용적으로 총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정책 권고 등의 단계에서 시민사회 및 정책자문위원 등 전문가와 협업해 의견수렴을 제대로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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