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와 협업이 가능한 근로자는
큰 이득을 보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일자리 갖기 위해
치열한 경쟁 벌일 것
1970년대 체스는 기계가 넘볼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었다. 초기 모델에 해당하던 벨(Bell)이라는 체스기계는 승수를 챙기기는커 녕 작동이 멈추는 일도 다반사였 다. 하지만 약 20년 뒤인 1997년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는 체스 챔피언이던 가리 카 스퍼로프를 2승 3무 1패의 성적으 로 꺾을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한 다. “체스는 인공지능의 초파리이 다”라는 말을 통해 체스가 인공지 능의 전체상을 엿볼 수 있는 도구 임을 강조했던 알렉산더 크론로드 (Alexnder Kronrod)의 말이 떠오 르는 대목이다.
기계 역할의 변화
과거 전통적인 체스 대회는 체스 그랜드마스터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랜드마스터란 국제체스연맹(FIDE)이 뛰어난 선수(보통 2500점 이상)에게 부여하는 타이틀이다. 이는 체스 대회는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기계에 의해 최고의 선수가 패배하자, 체스 게임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1990년 후반에 이르자 경기 중간에 그랜드마스터가 기계의 조언을 구하는 형식의 게임이 등장했다. 이를 ‘자유형 체스(Freestyle chess)’라고 이름 붙였다. 사람과 기계가 한 팀이 되어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완해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방식이다.
2000년 초반이 되자 자유형 게임은 사람의 체스 실력에 의해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컴퓨터의 프로그램 작동 방식을 잘 이해하는 선수가 게임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졌다. 2005년 시작된 자유형 토너먼트에서 우승자는 체스 실력이 각각 1684점과 1398점에 불과한 두 미국인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점수는 체스 동호회 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이들이 결승전에서 이긴 상대는 러시아의 체스 그랜드마스터인 블리디미르 도브로프(Vladimir Dobrov)였다. 자유형 게임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체스에 대한 이해도는 기계가 수행하는 체스 게임 전략을 이해할 정도면 충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 체스 게임에서 인간이 기여할 부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기계 혼자서도 인간의 도움 없이 충분히 체스 게임에서 승리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형 게임이 처음 등장했던 1990년 후반에는 기계와 인간이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함께 발전했지만, 기계가 인간을 넘어서자, 인간은 최소한의 전문지식만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자 해당 게임에서 인간의 역할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지능형 기계의 등장과 일자리
오늘날의 산업현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능형 기계의 다른 표현인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이제 갓 인간을 보완하기 시작한 단계로 경제 전반을 대체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기계와 인간의 협업으로 인한 변화들은 이미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2009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맞물리면서 생각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2009년 당시 전 지구를 덮친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 경제는 급격히 위축됐다. 더 이상 돈을 빌리기 어려워진 기업들은 당장에 보유한 현금이 부족한 문제에 직면했고, 소비자들은 소비 여력이 없어졌다. 기업의 인력감축은 필연적이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미래 기업경쟁력을 유지해야 했던 기업들은 필요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인력을 철저히 구분해 정리했다. 문제는 경기가 회복돼도 경기 침체기에 정리된 사람들은 다시 고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기업 내부에서 정리된 사람들이 맡았던 업무의 대부분을 기계와 기존 인력의 협업을 통해 보완했다는 사실이다.
기업 현장에서의 기계와 인간의 협업을 통한 생산성 증대는 근로자에게 요구하는 능력의 변화를 초래했다. 즉, 기계와 협업할 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지능형 기계를 다루고, 협업할 수 있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일자리 격차의 심화가 나타나는 이유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 복수의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저임금 일자리에서 기회를 찾는 것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후자의 사람들을 두고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Tyler Cowen)은 그의 책 ≪Average is over≫에서 ‘제로 한계생산물 노동자’라고 정의하는데, 미국 전체 노동인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생산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일자리의 수가 감소하고, 소득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원인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취업시장의 근본적 변화
지능형 기계와 인간의 하모니가 빚어 낼 노동시장의 변화는 근본적일 것이다. 미국의 경우 노동시장 변화로 인한 생산성 증가는 매우 직접적이다. 실업률이 가장 높았던 2009년, 미국의 노동생산성은 세 분기 연속 상승했다. 경기후퇴 수준은 1990년 이전과 비슷했지만, 기업들은 이전과는 달리 평균 혹은 평균 이하의 근로자를 해고했다. 특히 중간 임금을 받는 중간급 일자리를 줄일 경우 전반적인 생산성은 크게 높아진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고용주의 소득은 갈수록 늘어가고, 직장에서의 업무는 보다 목표지향적으로 변하며, 기계와 협업이 가능한 근로자는 큰 이득을 보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이다. 전공이 무엇이든, 관심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4차 산업혁명으로 표현되는 디지털 경제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김동영 < KDI 전문연구원 kimdy@kdi.re.kr >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