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스켈레톤의 우샤인 볼트’ 윤성빈(24)의 대관식을 저지할 경쟁자는 없었다.
윤성빈은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했다. 자신의 기록을 하나 하나 깨트리며 마침내 ‘1인자’자리에 올랐다. 새 스켈레톤 황제의 등극이다. 아이언맨이 드디어 날아올랐다.
◆숨어있던 ‘흙속의 진주’
윤성빈은 1994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무술년 개띠다. 아버지가 배구선수,어머니가 탁구선수 출신. 스포츠 DNA를 타고났다.
진작부터 개띠해인 올해 사고를 칠 것이란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그의 ‘스포츠 인생’이 처음부터 드라마를 예고했던 건 아니다.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를 꿈꿨다. 고향 남해군 유소년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 때만 해도 또래 아이들 사이에선 메시였고 호날두였다. 하지만 엘리트 축구선수로 성장할만큼 특출하진 못했다.
좋게 말하면 만능스포츠맨, 삐딱하게 보면 한쪽에 정착하지 못한 탓이었다. 대학진학을 앞둔 고3때까지 달리기,높이뛰기,배드민턴,농구 등을 전전했다. 공부를 해 체대에 가고 싶었다.
“운동신경은 남달랐지만,워낙 두루 두루 잘하다보니 무얼 해야 할 지 몰라 허둥댔다. 천재과는 아니었다”는 평가가 꽤 있었던 이유다. “딱 체육대학 들어가기 좋은 스펙”이라는 말도 있었다.
◆스켈레톤이 뭐예요?
‘흙속의 진주’를 알아본 건 고등학교 은사였다. 김영태씨(신림고 체육교사)는 “체대준비생들에게 팔굽혀펴기,높이뛰기,단거리 달리기 등을 시켜봤는데,입이 쩍 벌어졌다”고 말했다. 178cm의 평범한 키로 제자리 점프를 해 3m에 가까운 농구 골대를 건드렸던 것이다.
마침 김영태씨는 한국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 이사였다. 이게 6년을 이어온 스켈레톤과의 인연이 됐다. 2012년 6월, 늦잠을 자던 윤성빈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갔다.
“무슨 시험을 보는지도 몰랐는데,선생님이 전화해서 나가보라고 해서 그냥 나갔다”는 게 윤성빈의 말이다. 이 테스트에서 그는 30명중 10등을 했다. 준비가 안됐으니 성적이 좋을 리가 없었다.
늦잠까지 자다 불려나갔던 터라 몸이 제대로 풀릴 턱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강광배 교수의 눈이 번뜩였다.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아버지를 일찍 여읜 부분이 나랑 비슷해서 그런지 마음이 쓰였다. 키워보고 싶었다”는 게 강 교수의 말이다.
그는 그를 국가대표 상비군에 집어넣고 챙겼다. ‘스켈레톤 천재’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유명 스포츠 스타가 되고 싶던 평범한 체대 지망생과 비인기종목이었던 스켈레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늘 고민을 달고 살던 강 교수의 ‘수요’가 맞물리면서 한국의 스켈레톤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허벅지 깡패’라는 말을 듣는 둘레 63cm의 허벅지 사이즈도 이때부터 부풀기 시작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오직 스켈레톤을 위하여
윤성빈의 천재성은 얼마안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강교수가 재워주고 먹여주며 스켈레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3개월만이었다. 윤성빈은 두 번의 낙방 끝에 그해 9월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1위를 했다. 먼저 준비를 했던 대학생 형들을 모두 제쳤다.
이후 ‘일취월장’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탔다. 스켈레톤 입문 1년 4개월여 만인 2014년 1월 대륙간컵 4차 대회 1위에 오르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국가대표로 맞는 첫 올림픽의 부담은 컸다.
2014년 2월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썰매를 타는 게 너무 무섭다”는 말과 함께 훈련장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훈련장에 복귀했지만 윤성빈은 “소치 올림픽이 끝나면 스켈레톤을 그만둘 생각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심한 속앓이를 했다.
그를 다잡아 준 건 역설적으로 소치 올림픽이었다. 스켈레톤을 시작한 지 1년 6개월여 만에 받아든 성적 16위가 자극제가 됐다. 주변에서도 “가능성이 있다”는 격려가 쇄도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실력은 가속을 내기 시작했다.
2016년 2월 5일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2015-2016 7차 월드컵 대회에서 생애 처음으로 우승하고 금메달을 따냈다. 스켈레톤 입문 4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강광배 교수는 “마치 도화지 같았다. 그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선수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윤성빈은 지난 시즌 월드컵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3연속 금메달을 따내며 1인자 등극을 예고했다. 결국 윤성빈은 지난 시즌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막판 7개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 5개,은메달 2개를 거머쥐었다. 8시즌 연속 세계랭킹 1위를 독점했던 ‘스켈레톤의 독재자’ 마르틴스 두쿠르스(34·라트비아)를 황제의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쿨 가이’
윤성빈은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다. 그를 잘 아는 국가대표 동료들이나,코치 등 지인들의 한결같은 전언이다. 기분이 상하거나 마음이 불안정하더라도 그 때 뿐이라는 얘기다.
목표가 생기자 좌고우면하지 않고 금메달 담금질에 올인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는 평창 올림픽 슬라이딩 센터를 300번 넘게 타며 트랙을 모두 몸속에 녹여 넣었다. 타고난 독기다. 강광배 한국 체대 교수는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 순도 높은 멘탈이 맞물렸다. 스켈레톤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고 말했다.
마음이 헛헛할 때면 래퍼 BY의 음악을 들으며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푼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한 영화 아이언 맨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아이언맨 모형 수집은 그의 취미.그의 헬맷을 아이언맨으로 특수제작한 것도 그래서다.
한국은 윤성빈의 금메달로 전날까지 10위(금메달 1,동메달 1)였던 종합순위를 8위(16일 오전 기준)로 끌어올렸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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