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결정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방문에 대해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천안함 46용사 유족들은 “유가족 가슴을 찢는 일”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보수 야당은 “전범자 방한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경기 파주 통일대교에서 육탄 저지 투쟁에 나섰다. 이런 논란에도 김영철 일행은 25일 정부가 마련한 우회 군사도로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
천안함 유족에 사전 양해 구했어야
정부가 김영철 방문을 군말 없이 수용키로 결정한 때 이런 논란을 예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통일부는 북한의 통지문 접수 서너 시간 만에 “수용할 예정”이라고 했고, 그 즉시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영철을 만날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국민 소통을 중시해온 문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감안하면 정부는 최소한 천안함 유족들에게는 사전 양해를 구하는 게 순리였다. 유족들은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가 오는데, 정부가 유족들에게 통보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니냐”고 성토했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 때 논란이 된 선수들과의 소통 부족 문제가 재연된 것이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무효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용과 절차 모두 잘못됐다.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와 국민이 배제된 정치적 합의였다는 점에서 매우 뼈아프다.” 그런 문 대통령이 천안함 유족들의 이유 있는 항변을 어떻게 어루만져 줄지 궁금하다.
문 대통령의 신속한 결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북한을 비핵화 대화로 이끌어내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반도 4월 위기설이 퍼지고 있는 지금이 준(準)전시 상황이라고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정부가 북한에 “김영철 외에 보낼 간부가 없느냐”고 물어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너무 끌려다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죽하면 “김정은이 한반도 운전석에 앉았다”는 말이 나올까.
위험해보이는 文대통령의 운전대
미국 시선도 달갑지 않다. 미 국무부는 “김영철이 천안함 기념관을 가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24일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백악관 보좌관의 청와대 만찬에서도 온도차가 감지됐다. 문 대통령은 “모처럼 잡은 이 대화의 기회를 잘 살려 나가자”고 했다. 이방카는 남북 대화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대북 압박이 효과를 거뒀다. 한국의 대북 제재 노력을 지지한다”고만 했다. 뼈 있는 발언이었다.
몇 시간 뒤 트럼프 대통령은 딸에 맞장구치듯 추가 대북 제재를 발표했다. 아직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남북 대화를 활용해 제재 기조를 무력화하고 한·미 동맹의 균열을 조장하려는 김정은에게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트럼프는 “이번 제재가 효과가 없으면 2단계(Phase Two)로 가야 할 것이다. 2단계는 매우 거친 것이 될 수도 있고, 전 세계에 매우 불행할 수도 있다”고 했다. ‘거친 2단계’는 대북 군사옵션으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은 대화를, 트럼프는 압박을 하기로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문 대통령 운전대는 위험해 보인다. 문 대통령이 남북 대화에서 북한에 양보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운전석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국론은 더 분열되고 한·미 동맹도 크게 훼손된 채로 말이다.
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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