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철옹성'에 막힌 신산업…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

입력 2018-03-04 17:09  

혁신 가로막는 기득권 벽을 깨자
(1) 사회 곳곳 기득권 먹이사슬

산업·의료·교육 등 기득권 집단 '독과점 단물'
신규진입 불허 규제 뒤엔 공무원·정치권 결탁



[ 임도원 기자 ]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서비스업 혁신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의료채권 발행 허용을 검토했다. 의료기관이 시설 확충 등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회사채 형식으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의료채권 발행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부터 추진돼 이듬해 법안까지 발의됐으나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한의사협회 등이 “채권 발행이 용이한 대형병원에만 유리한 제도”라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서비스업 혁신 방안에 담기지 못했다. 원격의료 허용도 마찬가지다. 대형병원에만 환자가 몰릴 것이라는 이유로 의협 등에서 반대하면서 혁신 방안에서 빠졌다.

택시를 잡기 힘든 심야시간대 시민 편의를 위해 수년간 추진해오던 차량공유서비스 규제 완화도 끝내 무산됐다. 국무조정실은 지난달 발표한 ‘신산업 현장애로 검토과제’에서 “심야 차량공유서비스인 콜버스에 전세버스 진입 허용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놨다. 택시업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규제개혁이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득권층의 반발”이라고 했다. 그는 “어떤 규제가 만들어지면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기득권층이 생긴다”며 “규제 개선이나 철폐는 기득권의 보상체계를 깨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기득권층 반대로 의료기관은 채권을 발행하지 못해 환자 유치에 필요한 투자를 하지 못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채를 끌어다 쓰기도 한다. 원격의료가 허용되지 않아 오지 환자들은 의료사각지대에 놓이기 십상이다. 콜버스가 활성화되지 않아 심야 승객은 높은 택시비용을 내야 한다.

이런 사례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득권층이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 놓고 새로운 시스템이나 참가자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종의 지대추구 행위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기득권에 발목 잡힌 신산업

아산나눔재단은 최근 내놓은 ‘스타트업코리아 보고서’에서 세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상위 100곳(투자액 기준) 가운데 57곳은 한국에서 사업했다면 규제에 막혀 시작조차 못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득권을 보유한 기존 사업자와 이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인과 공무원의 결탁이 규제 뒤에 숨어 있다는 지적이다.

2014년 자본금 1000만원으로 시작한 온라인 중고차거래 서비스업체 헤이딜러는 이듬해 말 3300㎡ 이상 주차장 구비 등 시설요건을 갖추도록 자동차관리법이 개정되면서 문을 닫았다. 기존 오프라인 위주의 중고차 관련 단체들이 나서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이후 ‘스타트업 죽이기’ 논란이 일자 정부가 다시 지난해 9월 시설요건을 완화해 간신히 영업에 나섰다. 카풀 스타트업 풀러스는 지난해 선보인 ‘출퇴근 시간 선택제’ 서비스 때문에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기존 운수업계를 의식한 서울시가 경찰에 조사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기득권 때문에 기존 산업에서 신규 진입이 좌절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10년부터 추진된 제4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은 정부가 ‘2조원 자금력’ 등 까다로운 기준을 내세우면서 지금까지 수차례 불발됐다. 통신비 인하를 꺼리는 기존 이동통신사업자의 반발을 의식한 행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인 관광가이드도 자본금 2억원과 사무실을 갖춰야 하는 규제로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기존 관광업체의 반발을 우려해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공고한 전문직·공기업 장벽

의료시장 개혁의 핵심인 의사 수 확대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의료계 반대로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현재 한국의 임상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2명(한의사 포함)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다. 그런데도 의사 정원은 10년 넘게 제자리다. 변호사와 다른 전문자격사 간 동업 허용도 변호사업계 반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상비약의 편의점, 슈퍼마켓 판매 확대도 약사들의 반대로 10년 넘도록 제자리다.

공기업의 기득권도 산업 발전을 저해한다. 기재부는 정보통신기술(ICT)업체에 대한 스마트그리드(지능형전력망) 구축사업 허용을 서비스업 혁신 방안으로 추진했으나 전력 송배전사업을 독점하고 있는 한국전력공사와 소관부처 산업통상자원부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한국가스공사는 비싼 값으로 액화천연가스(LNG)를 독점 수입한다는 비판에도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고 있다.

교육·복지도 기득권에 사로잡혀

기득권은 산업에 국한돼 있지 않다. 교육 분야는 교수·교사의 기득권 행사로 개혁이 더뎌지고 있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직장인의 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초등학교 수업시간 연장을 검토 중이나 업무 연장을 꺼리는 교사들의 반발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초등학교 수업시간은 OECD 평균을 밑돈다. 대학은 사회 수요에 맞춰 학과를 개편하려 하지만 교수들의 반발로 제대로 추진되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복지도 기득권에 발목이 잡혀 있다. 같은 소득인데도 공무원·군인이 일반 국민보다 더 많은 연금을 타는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매번 찔끔찔끔 개혁에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부담해야 할 공무원·군인연금 부채는 2016년 750조원을 돌파했다.

김동원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각 분야에 걸쳐 깊숙이 뿌리 박혀 개혁을 방해하는 기득권을 그대로 두고선 저성장·고령화·양극화라는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기 어렵다”며 “정부도 기득권을 빼앗기는 층에 피해를 보상해주면서 반발을 줄이는 ‘빅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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