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개념과 이해 다루는 필수과목…기하 배워야"
올해 고교 신입생이 치르는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는 수학 ‘기하’를 출제하지 않는다. 이과 학생들이 주로 응시하는 수학 가형에서도 빠졌다. 지난달 19일 수능 출제범위 관련 공청회에서 이러한 안이 제시되자 과학기술계는 강력 반대했다. 공간의 개념과 이해를 다루는 기하는 필수소양이란 이유였다.
한 마디로 “기하도 안 배우면 그게 이과냐”라는 거였다.
그러나 교육부는 기존 안을 그대로 확정했다. 새 교육과정에서 심화과목으로 바뀐 기하의 수능 출제는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수험생 학습 부담 완화도 감안한 결정이다. 교육부가 최종안을 발표한 날, 대한수학회장인 이향숙 이화여대 수학과 교수(사진)를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났다.
“기하는 수학의 역사, 나아가 인류 문명과 함께 해온 분야입니다. 고대 농경사회부터 뿌리내린 생활밀착형 학문이죠.” 이 교수가 입을 뗐다. 기하를 제외한다는 걸 생각하기 어렵단 투였다. “그런 걸 떠나 기하는 고교 교육과정에서 공간인지능력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단원이에요. 그래서 기하가 빠지면 안 된다, 수차례 얘기했는데….”
몇 마디 하지 않아 그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전공에 꼭 필요한 학생만 대학에 진학해 배우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기하는 특정 전공에서 필요한 게 아니라 과학기술의 기본소양이다. 수능에서 통째로 들어내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고교 과정의 기하는 도형, 공간좌표, 2차 함수 등 기본개념을 가르친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이 도형 개념을 정리한 이래 데카르트가 좌표 개념을 도입했고 뉴턴의 연구에서 미분기하학이 만들어졌다. 물리학이나 기계공학에서 다루는 사물의 구조, 동작 추적 등도 기본원리는 기하의 개념에서 나온다.
이 교수는 “단지 개념을 배워야 한다는 게 아니다. 수학의 특징인 추상화를 통한 상상력이 중요하다”면서 “예를 들어 평면은 2차원, 우리가 사는 공간은 3차원인데 공간 차원 단위가 무엇인지 수학적으로 접근해 4차원, 나아가 n차원으로 일반화해나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기술계는 기하가 최근 화두인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이 된다는 점도 강조해왔다.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3D프린팅 등 신기술에 기하의 감각이나 방정식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적용되는 건 고차원 기하다. 이 교수는 “적어도 고교 수준에서 기하의 기초는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하가 심화과목이고 학습량 경감 때문에 수능에서 뺀다는 건데요, 어려우니까 빼자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쉬운 것만 배우는 게 결코 학생을 위하는 길이 아니거든요. 좀 어렵더라도 정말 필요하다면 배워야 하는 것 아닐까요?”
어려우니까 배우지 말자는 건 근시안적 사고라는 비판이다. “그렇게 한계를 미리 설정하면 오히려 성장의 폭을 제한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는 ‘어려운 내용을 쉽고 흥미 있게 가르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 교수는 개정 교육과정의 기하가 사실 어려운 과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학습량을 따지면 기존 과목 ‘기하와벡터’의 60%대에 그친다. ‘진로선택과목’ 기하와 ‘전문교과과목’ 벡터로 분리되면서 공간벡터 등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내용도 많이 빠졌다. 이에 따라 체감 학습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는데 수능에서 아예 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라고 되풀이 지적했다.
“정확히는 (학습 부담) ‘경감’이 아니라 (수능 출제) ‘제외’인 거죠. 어려운 과목이라 사교육, 선행학습 우려가 있다는 얘긴데 본말이 전도됐어요. 그 결과가 뭔가요. 교육과정을 개정할수록 ‘수학을 안 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 보세요. 수학·과학교육 강화·심화 방향으로 가거든요. 지금 우리만 시대에 역행하는 거예요. 인적 자원 기반으로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 나라에 맞는 방향인지 깊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기하 제외 논란에 한국수학관련단체총연합회(수총)는 해외 5개국의 수학분야 대입시험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일본은 이과 시험에서 기하·벡터뿐 아니라 국내 교육과정에선 제외된 복소평면·극좌표 등을 출제했다. 문과 시험에서도 삼각함수, 미적분을 비롯해 심화 수준 수열과 공간벡터 내용까지 평가한다고 짚었다. 미국은 고교 심화학습 과정(AP 코스)의 경우 모수함수, 극형식함수, 벡터함수, 다항식 근사 등 기하 과목을 토대로 출제하며 영국도 최근 대입 시험(A레벨)을 개정해 기하를 포함한 필수응시 영역을 강화했다.
수총이 분석한 해외 케이스는 수능과 동일한 성격의 시험은 아니다. 일본 문과 시험 사례는 교토대의 본고사 문항이었다. 비교 대상이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 교수는 “수능 문항이든 본고사 문항이든, 각국 학생들이 어떤 내용을 배우고 평가받는지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논란을 어떻게 판단할까. 크게 문제 될 것 없다는 입장이다. 수능 출제범위에서 제외할 뿐, 이공계 진로를 선택한 학생들은 기하를 배울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능과 무관한 과목을 교실에서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기란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교육과정 설계와 대입 평가,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평가에 강조점이 있다고 봐야죠. 결국 그 영역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평가를 하는 거니까요.”
그는 교육 당국의 의사결정 과정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이번 개정 교육과정은 최근 논란이 불거졌지만 이미 2015년 결정됐다. 당시 학계에서 이의제기를 많이 했는데 교육부는 “기하를 진로선택과목으로 둔 것은 이공계에 진학할 학생들은 당연히 들어야 하기 때문”이란 논리를 내세웠다고 전했다. 평가(수능 출제)도 당연히 이뤄진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였다고.
교육부가 기하 제외 근거로 공개한 설문 결과에 대해서도 “대한수학회는 교육부의 협조 요청 공문조차 못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설문 문항 역시 문제가 있다고 봤다. 그는 “제시된 두 가지 보기 모두 기하는 제외된 내용이었다. 만약 1안 기하 포함, 2안 기하 제외 식으로 물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번 수능 출제범위 결정은 어쩌면 맛보기일 수 있다. 올 8월까지 2022학년도 이후의 수능을 포함한 대입제도 개편을 확정하는 더 큰 ‘판’이 깔리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를 염두에 두고 “고교 수학 교과목 이수단위를 조정해서라도 기하가 들어가는 게 바람직하다.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한 시간 남짓한 문답에도 설명이 미진하다 느꼈는지 그는 인터뷰 말미에 현실에서의 기하 활용 사례를 여럿 귀띔했다.
“구글 검색엔진, 페이스북 친구 매칭도 선형대수와 조합론 등에 기반한 수학적 알고리즘입니다. 암에 걸리지도 않은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 절제술을 미리 받은 것 또한 미국 스타트업 아이야스디(Ayasdi)의 위상학적 데이터 분석(TDA)에 바탕한 결정이었어요. TDA는 빅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인데 위상수학(topology: 공간 속 점·선·면, 위치와 형상에 대한 공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 기반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대학에서 다루는 위상수학이 넓게 보면 바로 기하 영역이죠. 보통 빅데이터는 통계라 생각하는데 이처럼 많은 경우 수학이 기반이에요. 고교생 때 기초부터 튼튼히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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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변성현 한경닷컴 기자 byun8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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