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세 낮추고 관세폭탄
"미국 와서 일자리 만들란 얘기"
한국은 통상전략 안 보여
"기업환경 개선 서둘러야"
미치광이식 '아메리카 퍼스트'…자세히 보면 '일자리 퍼스트'
외국기업 팔 비틀어 공장 무더기 유치
저소득 백인 고용 확대…대통령 재선 노려
한국, 법인세·최저임금 인상…일자리 위기
[ 양준영/이태훈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통상전쟁의 회오리로 몰아넣었다.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에 이어 지난 1일엔 국가안보 위협을 명분으로 모든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각각 25%와 10%의 ‘관세폭탄’을 때리겠다고 선언했다. 설마 하던 한국 유럽연합(EU) 캐나다 일본 등 동맹국들은 관세 부과 대상에 포함되자 ‘충격’에 빠졌다. 동맹국까지 대미 보복을 경고하고, 미 의회는 물론 백악관 참모들까지 반대 목소리를 내도 트럼프 대통령은 ‘마이 웨이’다.
미국의 통상전쟁 ‘액션’은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노골화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1월 출범한 이후 예견된 행보다. 전문가들은 1년 동안 트럼프 정부가 추진해온 △법인세 최고세율 35%에서 21%로 인하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추진 △글로벌 기업의 미국 내 공장 유치 △반(反)이민정책 △세이프가드 발동 및 보복관세 부과 등의 뿌리는 자국 기업 보호와 일자리 창출의 의지라고 진단한다. 보호무역 대상 업종은 트럼프의 핵심 지지 기반인 ‘러스트 벨트(미국의 쇠락한 중북부 공업지대)’와 관련이 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주요국이 통상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자국 기업과 일자리 보호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무방비 상태다. 오히려 정반대로 가고 있다. 각국이 기업 유치를 위해 법인세율 인하 경쟁을 벌이는 것과 달리 한국은 지난해 법인세 최고 세율을 22%에서 25%로 높였다.
기업 비용을 늘려 일자리 감소를 불러오는 정책도 내놓고 있다. 올해 최저임금을 시간당 7530원으로 16.4% 인상한 데 이어 오는 7월부터 근로시간을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미국의 통상압박이 거세질 것이란 예상이 있었으나 한국 정부는 통상조직 이관 논의로 몇 개월을 허비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통상교섭본부를 발족했지만 장기적인 통상전략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연초부터 통상전쟁이 본격화하고 있지만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미 행정부, 의회 등과의 접촉을 확대해 철강업계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설득할 것”이란 원론적 얘기만 반복하고 있다.
“심각한 우려를 표시한다.”(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좌시하지 않겠다.”(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든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각각 25%와 10%의 ‘관세폭탄’을 때리겠다고 밝히자 동맹국에서도 서슬퍼런 경고가 터져나왔다. 미 언론들은 일제히 ‘트럼프의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트위터에 “거의 모든 무역거래에서 우리가 지고 있다”며 고율 관세 부과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 친구와 적들은 여러 해 동안 미국을 이용해먹었으며 우리의 철강과 알루미늄산업은 죽었다”며 “미안하지만 이제 변화할 시간”이라고 올렸다.
◆‘아메리카 퍼스트’ 노골화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 강공에 대해 전문가들은 취임 첫해 법인세 감세와 규제 완화 조치에 이어 강력한 무역장벽으로 해외 기업의 미국 내 공장 설립을 촉진하기 위한 승부수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당시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 투자를 유치하고, 불공정한 무역협정을 폐기하고,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공언했다.
지난 1년의 행보는 이를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일자리를 지키겠다며 반(反)이민정책을 강화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도 미국에 유리하게 개정하든가 아니면 폐기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해외 기업들은 하나둘 미국 내 공장 설립을 발표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에 이어 애플 하청업체인 대만 폭스콘, 일본 도요타자동차 등이 새 공장 건설에 나섰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해 말엔 법인세 최고세율을 35%에서 21%로 낮추는 등 31년 만의 최대 감세를 단행했다. “세금을 깎아줄 테니 해외에 있는 현금을 미국으로 가져오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정책에 애플 등 미국 글로벌 기업들은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약속하며 화답했다.
◆노린 것은 기업 유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외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한 뒤 “LG와 삼성이 미국에 세탁기 제조공장을 짓겠다는 최근 약속을 완수할 수 있도록 강력한 유인책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세탁기를 미국에 팔려면 생산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라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알루미늄 고율 관세 부과를 강행하는 것은 핵심 지지 기반인 ‘러스트벨트(미국의 쇠락한 중북부 공업지대)’의 백인 저소득 근로자 상당수가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자리를 살려 오는 11월 의회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고, 이를 발판으로 재선에 성공하겠다는 정치적 전략과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의 계속된 통상 압박에 관련 업계는 현지 생산기반 마련 외에는 뚜렷한 대안이 없어 속만 태우고 있다. 한국 철강업체 넥스틸은 관세폭탄을 피하기 위해 미국 현지공장을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뒤늦게 대응 나선 한국 정부
중국, 유럽연합(EU) 등이 보복관세 맞대응을 경고하며 ‘글로벌 무역전쟁’이 전면화하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는 통상전략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수입 철강·알루미늄에 고율관세 부과 방침을 밝히는 등 통상 압박이 발등의 불로 떨어지자 정부는 뒤늦게 대책회의를 열어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일 대외통상관계장관회의에서 “정부는 최근 대외통상 상황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다”며 “전 부처가 긴밀히 공조해 대외 리스크에 기민하게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 상황을 무역·통상정책 전환 계기로 삼겠다고도 했다.
김 부총리는 미국발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대응해 이날 예정에 없던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도 미국의 철강 제품 고율 관세 부과 방침 등 보호무역 조치에 대한 뚜렷한 대응 방안은 내놓지 못했다.
양준영/이태훈 기자 tetriu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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