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광화문 글판

입력 2018-03-05 18:00  

고두현 논설위원


단비 끝에 봄이 왔다. 버들강아지 솜털이 앙증맞게 손을 흔든다. 광화문 글판도 봄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김광규 시 ‘오래된 물음’의 맨 끝구절이다.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해마다 봄은 오지만 이를 대하는 마음은 늘 새롭다. 올해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과 ‘튀어오르는 몸’으로 새 봄을 맞는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광화문 글판은 1991년부터 줄곧 희망을 노래했다. 첫 문구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 활력 다시 찾자’도 가난을 이기자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는 감성적인 시를 활용해 위안과 용기를 동시에 주고 있다.

글판 아이디어는 교보생명 창업자인 고(故) 신용호 회장이 냈다. 그는 금싸라기 땅인 교보생명 지하에 ‘돈 안 되는’ 교보문고를 열고, 시민들에게 꽃향기를 선물하려고 건물 앞에 라일락을 심었다. 그의 경영철학이 광화문 글판에 배어 있다. 30자 이내의 짧은 문구지만 수많은 이들이 여기에 감동했다.

사업에 실패한 가장은 시내버스 뒷좌석에서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라는 장석주의 ‘대추 한 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실의에 빠진 젊은이는 ‘푸른 바다에는 고래가 있어야지/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정호승 ‘고래를 위하여’)에서 용기를 얻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꼽힌 문구도 희망과 사랑의 시구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외국 시도 등장했다.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 ‘있잖아,/ 힘들다고 한숨 짓지 마/햇살과 바람은/ 한 쪽 편만 들지 않아’(일본 시인 시바타 도요) 등이 글판을 수놓았다.

올해 봄시로 뽑힌 김광규의 ‘오래된 물음’은 39행짜리 장시다.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로 시작하는 이 시는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에서 분위기를 바꾼 뒤 라일락과 아이들의 생명력으로 세상의 봄을 밀어올린다.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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