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버틸 힘이 없다"… 영세 섬유사 1만9000여곳 줄도산 위기 내몰려

입력 2018-03-06 17:41   수정 2018-03-07 05:06

기로에 선 한국 섬유산업

산업리포트 - "문 닫을 일만 남았다" 섬유 기업인들의 탄식

수출 줄고 단가는 '반토막'
저임금 중국·터키에 시장 내줘
세계시장 점유율 5→1.7%

쪼그라든 기업 규모… 직원 50인 미만이 98.4%
최저임금 급등으로 고통… 근로시간 단축 땐 '치명타'

고용효과 큰데 정부 외면
"고용위기지역? 섬유단지는 상시 실업에도 관심 안둬"



[ 안효주 기자 ] 지난달 말 부산 신평동에 자리잡고 있는 한신모방. 소모사 화섬사 등을 생산해 연간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섬유회사다. 46년째 ‘섬유 외길’을 달려온 백성기 회장(78·사진)은 “올해가 운명의 해”라고 말했다. 중국과 동남아산(産) 섬유제품 수입 증가로 사업 환경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지만 임금은 다락같이 뛰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주변에 문을 닫겠다는 업체가 속출하고 있다”며 “최저임금이 16.4% 인상된 것이 결정타”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적자로 돌아선 이 회사는 올해도 적자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끝없는 추락

그렇다고 100여 명에 이르는 직원을 쉽사리 해고할 수도 없다. 백 회장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는 직원들을 어떻게 정리하느냐”고 말했다. 한신모방 직원은 대부분 50~60대 여성이다. 수십 년간 고락을 함께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백 회장은 “정부가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시간당 1만원으로 올리면 매년 15%씩 임금을 올려줘야 하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경영 여건이 더 어려워져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못 줄 바엔 여력이 있을 때 미리 조치(폐업)를 취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고 덧붙였다. 전국에 산재한 2만2000여 개 섬유업체 경영자들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취재 현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섬유업계 기업인들은 백 회장처럼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30여 년 전 대한민국 수출액(472억달러)의 4분의 1을 담당했던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 섬유산업이 사양화의 길로 접어든 가장 큰 이유는 국제 경쟁력 약화다. 매년 줄어드는 수출액이 그 결과다. 지난해 섬유 수출은 137억달러로 2000년(188억달러)에 비해 27.1% 감소했다. 수출단가는 더 크게 추락했다. 1990년대 초 ㎏당 9달러를 넘던 국내 섬유제품 수출단가는 이후 급락과 급등을 반복하다 2000년대 들어 ㎏당 4달러 선으로 떨어졌다. 2010년 이후 ㎏당 5달러를 넘어 소폭 회복했지만 지난해 ㎏당 4.8달러를 기록하는 등 다시 하락세다. 반면 국내 소비 수준이 높아지면서 수입단가는 꾸준히 상승해 ㎏당 7달러 선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0년 5.0%에 달했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10년 2.1%, 2015년에는 1.7%로 떨어졌다. 저임금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 인도 터키 등이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기 포천에 있는 종업원 20명 규모의 한 섬유업체 사장은 “중국이 최근 몇 년간 품질을 끌어올리면서도 오히려 가격을 낮추는 바람에 국내외 매출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오갈 데 없는 근로자들

이런 가운데 기업 규모도 급속도로 쪼그라들고 있다. 현재 섬유산업을 이끄는 대부분 업체는 직원이 50명 미만이다. 한국 섬유업체는 2016년 기준으로 총 2만2750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50명 미만이 일하는 업체(2만2383개)가 전체의 98.4%를 차지한다. 10명 미만이 일하는 업체가 압도적으로 많다. 총 1만9616개로 전체의 86.2%에 이른다.

이런 기업들에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직격탄이다. 경북 경산에서 30명 규모의 편직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M사 관계자는 “중간에 그만두는 근로자가 나와도 빈 자리를 채울 수 없다”며 “어차피 2021년 7월부터 근로시간 단축이 시행되면 공장을 돌릴 수 없을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섬유산업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대구로 가면 정부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상당하다. 다른 업종으로 전직이 거의 불가능한 근로자가 모여 있는 업종 특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했다. 대구 평리동 염색산업단지공단의 기업인 P씨는 “섬유업체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가장 취약한 근로계층”이라며 “정부가 임금을 많이 올려줘서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지적했다. 공장이 문을 닫으면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다는 것이다.

대구의 중소 섬유업체들 가운데선 주문받은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올해까지만 공장을 가동하고 내년부터 문을 닫겠다는 곳이 적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또 다른 기업인 H씨는 “정부가 한국GM 군산공장 폐쇄가 발표된 뒤에 군산을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한다고 하던데, 정작 상시적으로 실업자가 발생하고 있는 섬유업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6년 기준 국내 섬유업계 근로자는 15만여 명에 달한다. 노동집약적 특성을 갖고 있어 다른 제조업종보다 고용유발계수가 높은 편이다. 폐업하면 피해를 보는 근로자가 많다는 얘기다. 국내 대표 섬유기업인 전방은 누적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올해부터 광주·시흥공장 두 곳을 폐쇄했다. 이 여파로 2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부산·대구·포천=안효주 기자 j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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