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선수도 예쁘다고 부러워해"
"한국선 섬유를 '철 지난 산업' 취급
기술·노하우 있다면 잠재력 크죠"
[ 조아란 기자 ] 역대 최다 메달(총 17개)이 쏟아졌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 화제 중 하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패션이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시상대에서 입은 수상복, 개회식·폐회식복, 일상복 등 총 22가지 ‘팀코리아 단복’은 관람객은 물론 외국 선수에게도 인기였다. 이 옷들을 제작한 아웃도어 업체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스포츠의류 부문 공식 파트너인 영원무역이다. 스포츠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생산하는 업체로 유명하다. 지난 6일 저녁 서울 명동에 있는 중식당 동보성에서 만난 성기학 회장은 “외국인도 한국 선수들의 옷이 예쁘다고 하더라”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퍼펙트 게임’이었다”고 자평했다.
성 회장은 만 27세이던 1974년 영원무역을 창업해 올해로 43년째 회사를 이끌고 있다. 국내 섬유산업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2014년 8월부터 5000여 개 섬유 관련 기업을 회원사로 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수장을 맡고 있다. 작년 선거에서 연임이 확정돼 앞으로 3년 더 한국 섬유산업을 이끌 예정이다.
“1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
중식당 동보성은 성 회장의 단골집이다. 영원무역 명동 사옥에서 10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40년 넘게 영업 중인 곳으로 곳곳에 장식품이 놓여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 회장은 “1995년 세운 칭다오 공장을 방문하기 위해 5~6개월에 한 번씩 중국을 오가며 중국 음식에 맛을 붙였다”며 “주방장이 중국인인데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중국 음식을 ‘현지화’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단골인 성 회장은 메뉴판에도 없는 ‘원래 먹던 것’을 주문했다. 특별 코스요리였다. 해파리냉채, 게살샥스핀수프, 해삼, 왕새우칠리소스, 송이전복, 소고기와 채소 요리 등 총 6가지 요리가 차례로 나오고 군만두와 식사가 추가로 나왔다.
성 회장은 “1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 출장으로 보내다 보니 입맛이 다양해져 뭐든 잘 먹는다”며 웃었다. 영원무역은 40여 개 해외 브랜드에 아웃도어 의류를 납품하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다. 해외 6개국에서 생산공장을 운영 중이다. 1980년 방글라데시 치타공 공장을 시작으로 1995년 중국 칭다오, 2001년 엘살바도르, 2004년 베트남 남딘에서 의류공장을 가동했다. 지금은 국내 섬유업체들이 저임금을 찾아 동남아시아 등지로 둥지를 옮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지만 1980년만 해도 의류업계에서 해외 투자를 감행한 것은 성 회장이 처음이었다.
성 회장은 요리와 함께 마실 술로 연태고량주를 주문했다. 숙취가 없는 것을 고량주의 최고 장점으로 꼽았다. 성 회장은 평생 운전을 해본 경험이 없다. 그는 “만 27세인 젊은 나이에 창업하면서 회사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며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회사를 책임지지 못할까봐 걱정돼 면허를 아예 안 땄다”고 말했다.
사진 취미 덕분에 패션업과 인연
성 회장은 이날 봄여름(S/S) 시즌 신제품 품평회를 마치고 왔다고 했다. 그는 음식을 먹으면서 “옷을 보는 눈만큼은 아직 날카롭다”며 “색약이 있어 공대에 입학하지도 못했는데 옷은 멀리서 봐도 맞지 않는 색상과 재봉(시침질)이 다 보인다”고 했다.
성 회장의 어릴 적 꿈은 토목학과를 나와서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파리의 하수도처럼 철근과 콘크리트로 된 도시 하수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963년부터 모은 카메라가 6000개를 넘을 만큼 기계광인 그는 정밀하고 질서정연한 과학의 세계가 좋았다. 하지만 색약인 눈 때문에 공대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문과로 전향해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그가 입사한 회사는 ‘서울통상’이었다. 1971년 당시 국내에서 수출을 두 번째로 많이 하던 가발회사였다. “입사 때 ‘취미가 뭐냐’고 물어봐 사진 찍는 것이라고 하니 패션부문으로 보내더라”며 “이때부터 패션 영업을 시작해 섬유패션 분야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통상에서 3년간 근무한 뒤 지인들과 함께 영원무역을 창업했다.
영원무역은 지난해 매출 2조93억원, 영업이익 1811억원을 기록한 국내 아웃도어업계 1위 회사다. 성 회장은 “가장 큰 위기는 1990년대 초 방글라데시에 사이클론과 해일이 발생해 새로 지은 공장이 큰 피해를 입은 일”이라고 소개했다. 당시 옷 30만 장이 고스란히 바닷물에 잠겼다. 그러나 바이어들을 설득해 주문 취소율을 3%로 낮췄고 밤을 새워 한 달 반 만에 납기를 맞췄다. 영원무역은 1997년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자회사인 지금의 영원아웃도어를 통해 국내시장에 도입하여 국내 아웃도어 산업을 크게 일으키고 줄곳 시장을 선도해왔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해야
성 회장은 ‘섬유산업이 이제는 사양산업으로 불리지 않느냐’는 말이 나오자 고개를 저으면서 고량주를 한 잔 들이켰다. 그는 “세계에는 섬유 한길만 판 기라성 같은 기업이 많다”며 “정부가 섬유산업을 도매금으로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페인 최고 부자는 자라를 생산하는 인디텍스의 아만시오 오르테 회장”이라며 “일본의 유니클로, 스웨덴의 H&M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류업체가 수없이 많다”고 말했다. “동대문에서 원단을 떼 옷을 만들어 파는 곳 중에도 창업 몇 년 만에 큰 성공을 거둔 곳이 많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이런 잠재력이 단순히 브랜드를 갖춘 업체라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게 성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작년 섬유업계 투자단을 이끌고 다녀온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섬유공장에 일자리 한 개에 최고 3000달러(약 352만원)를 지원하는 등 섬유 생산 공장 유치를 위해 유인책을 내놓는다”며 “미국이 한국보다 못 살아서 섬유 생산 업체를 유치하려고 하겠느냐”고 말했다. 자체 브랜드가 없는 OEM 업체도 오랫동안 쌓아온 기술과 노하우가 있으면 성장 잠재력이 충분하고, 고용 창출 효과도 크다는 것이다. 그는 “섬유산업을 ‘이미 철 지난 산업’으로 보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성 회장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change or die)”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달 섬유업계 신년간담회에서 개회사를 했을 때도 ‘change or die’를 말했다. 신소재 섬유 개발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 회장은 “영원무역도 미국에서 섬유 연구 역량이 가장 높다고 판단한 노스캐롤라이나대와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라며 “시애틀에 있는 아웃도어 리서치 (영원무역 자회사) 공장에선 연구를 통해 개발한 장갑 등을 생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성 회장의 새로운 목표는 세계 10위 안에 드는 아웃도어 업체를 만드는 것이다. 영원무역이 규모 면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판단하지만 질적인 성장이 남은 과제라는 설명이다. 이번에 올림픽 단복을 제작한 것도 질적인 성장을 위한 시도다. 성 회장은 “3년 동안 올림픽 준비를 위해 숨가쁘게 달려왔다”며 “옷을 판 것이 아니라 후원한 것이라서 금전적으로는 300~400억 정도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의류 브랜드로 국위선양을 해 보람이 있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성 회장의 못이룬 건축가의 꿈… "고택 등 헌집 고치는게 취미죠"
성기학 회장은 고가 복원에 관심이 많다. 성 회장 고조부가 창건한 '아석헌'을 비롯한 30여채의 고가 중 10여채가 한국전쟁 때 소실됐으나 성 회장은 10여년에 걸쳐 복원했다. 현재 방글라데시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유명 고적(Baro Sardar Bari)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에 걸쳐 복원했다.
성 회장은 "원래부터 '짓는 것'을 좋아한다"며 "공장에 들르려고 방글라데시를 방문할 때마다 고적이 조금씩 복원돼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게 소소한 낙"이라고 말했다. 복원된 건축물들은 복원전문 건축가와 장인들을 교육 양성하는 전문 학당으로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
△1947년 서울 출생
△1965년 서울사대부고 졸업
△1970년 서울대 상과대학 무역학과 졸업
△1972~1973년 서울통상 근무
△1974년 영원무역 설립
△1984년 영원무역 대표이사·회장
△1992년 골드윈코리아 (현 영원아웃도어) 설립
△1998년 무역의 날 ‘1억불 수출의 탑’
△2008년 금탑산업훈장
△2009년~2016년 영원무역홀딩스 대표이사 회장
△2014년~현재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2016년~현재 국제섬유생산자연맹 수석부회장
성기학 회장의 단골집 동보성
기름기 뺀 동파육, 옛날 맛 삼선짜장면 등 인기
1975년 서울 명동에 터를 잡은 동보성은 명동역 3번 출구에서 1분 거리에 있다. 3번 출구에서 나와 남산 방향으로 몸을 틀면 영원무역 명동사옥 바로 옆에 보인다. 43년째 운영 중인 집답게 건물 외관과 내부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내 인테리어는 중국 황실을 본떠 꾸몄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진귀해 보이는 작품이 곳곳에 놓여 있다. 식사 자리는 룸이 대부분이다. 룸에서는 코스 요리를 시켜 먹는다. 상견례와 비즈니스 미팅을 하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변함없는 맛을 낸다는 것이 이 집의 장점이다. 짜장면 탕수육 등 서민이 즐겨 먹는 메뉴가 옛날 맛 그대로다.
청경채 삼겹살찜(동파육·3만3000원)이 이곳의 대표 메뉴다. 기름기를 쫙 빼 식감이 부드럽다. 옛 맛 그대로인 삼선짜장면(8000원)과 탕수육(2만2000원)도 인기다. 사천탕면(1만원)도 많이 찾는다. 명동이 본점인 이 집은 지난해 5월 강남에 2호점을 냈다.
조아란 기자 arc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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