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인권, 삶 속에 녹아들다

입력 2018-03-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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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redpr@redcross.or.kr


독일에서 공부할 때 이야기다. 먼 이국땅에서 혼자 유학하는 필자를 배려해 동료들이 종종 저녁 식사에 초대해줬다. 독일 가정을 방문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남편이 식사도 준비하고 설거지도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그게 뭐가 놀라워?’라고 생각하겠지만 1960년대 한국이 지독한 가부장적 사회였다는 걸 감안하면 문화 충격에 가까웠다. 당시 독일도 남성의 권위와 힘이 여성을 훨씬 뛰어넘는 사회였지만, 한국과 다르게 부부가 서로 돕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권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권대사로 활동할 때 이런 일도 있었다. 한센병 환자 모임에 초대받아 강의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루는 강연을 잘 마치고 시간이 늦어 근처 숙소로 가려고 하는데, 그 모임 회장과 임원들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대사님, 우리들은 여기 콘도에 오면 꼭 오후 7시30분에 같이 공중목욕탕에서 목욕하며 회의를 하고 맥주를 마십니다. 대사님이 여기서 주무신다니 잘됐네요. 우리 같이 목욕해요.”

한센병이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 만난 사람과 탕 안에 같이 들어가려니 솔직히 거리끼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내 양심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기에 그들과 함께 탕에 몸을 담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탕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됐다. 나 자신을 얽매고 있던 편견과 그릇된 관념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것이었다.

인권은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에 용해돼 살아 움직일 때 더욱 빛난다. 아무 편견이나 거리낌 없이 우리 삶에서 표현하고 실천할 때 더욱 가치를 드러내는 덕목, 그것이 인권이다.

새벽에 운전하다 보면 단속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어서인지 교통 신호가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된다. 신호 안 지키는 사람, 과속하는 사람, 무단횡단 하는 사람 등을 수도 없이 본다. 인권 선진국에 가면 이런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소한 데서부터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이란 나 혼자 잘살아 보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점점 멀어지는 신기루 같은 존재가 인권이다. 부부가 서로 희생하고 양보하는 모습,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도 교통 법규를 준수하는 모습, 남을 배려하고 작은 친절을 베푸는 모습,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을 두는 모습, 더 나아가 타인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동일시하는 모습이 우리 삶에 녹아들 때,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인권 존중 사회가 열리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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