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둘러싼 각국의 규제가 완화되는 가운데, 고강도 규제에 봉착한 국내 업계는 글로벌 시장에서 낙오자가 될 처지에 놓였다. 특히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암호화폐 규제 수위가 부작용 예방 정도에 그치며 해외 업계와 국내 업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20일 암호화폐 거래소 통계 정보 제공 사이트 코인힐스에 따르면 올해 초 거래량 기준 세계 1위였던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는 6위로 추락했다. 업비트의 일일 거래량은 한때 10조원에 달했지만 최근 7000억원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인데, 주된 원인은 정부에 있다.
올해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를 도입하며 정부는 일선 은행들에 암화화폐 거래용 신규 가상계좌 발급과 입금을 금지한 바 있다. 1월 30일 신규 투자가 허용됐지만 정부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암호화폐 거래로 발생하는 문제를 은행 이사진과 최고경영자(CEO)에게 묻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무거운 책임을 떠안은 은행들이 신규 계좌 발급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사실상 신규 투자가 금지된 것이다.
암호화폐공개(ICO)를 준비하는 국내 블록체인 기업들은 국내 규제를 피해 해외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현대그룹 계열사 현대BS&C는 스위스에 법인을 설립하며 암호화폐 ‘에이치닥’ ICO를 진행했고 한빛소프트도 자회사를 통해 홍콩에서 암호화폐 ‘브릴라이트 코인’ ICO를 열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ICO는 유망한 블록체인에 효과적으로 투자할 기회인데, 한국에서 만든 암호화폐를 스위스, 홍콩 등에서 공개하는 것은 외국인 배만 불려주는 꼴”이라며 “업계 대다수가 국내 ICO를 희망하지만 정부 눈치 보느라 어쩔 수 없이 해외로 가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국내 블록체인 기업들과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규제의 철퇴를 맞은 사이 해외 블록체인 기업과 거래소들은 한국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시장 초기에 한국이 ‘큰 손’으로 떠올랐지만, 정작 한국 기업들이 안방을 포기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해외 블록체인 기업들은 투자자들을 만나 기업 현황을 소개하는 ‘밋업(Meetup)’ 행사를 국내에서 꾸준히 열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이더리움 공동 창업자인 찰스 호스킨스가, 18일에는 두안신싱 바이텀 CEO가 서울 청담동에서 투자자들을 만나 각각 암호화폐 카르다노, 에이다와 바이텀의 비전을 설명했다.
해외 암호회폐 거래소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투자금을 받은 스타트업 서클은 최근 암호화폐 거래소 폴로닉스를 인수했다. 제러미 얼레어 서클 최고경영자(CEO)는 향후 주력할 시장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 홍콩을 꼽았다. 후오비,오케이코인 등 중국 암호화폐 거래소도 한국법인을 내고 진출을 모색 중이다.
2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는 당초 암호화폐 퇴출 등 고강도 규제안이 논의될 것으로 알려졌지만, 범죄 악용을 막는 정도의 성명만 채택될 전망이다. 암호화폐에 대해 G20 금융안정위원회(FSB)가 세계 금융 안정성을 위협하진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앞서 존 글랜 영국 재무차관은 한 컨퍼런스에 참석해 “영국 정부는 암호화폐 시장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며 암호화폐를 활성화해 금융 허브 입지를 굳히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중국과 싱가포르는 법정통화를 자체 암호화폐로 전환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미국과 일본은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데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본은 암호화폐를 결제수단으로 인정했고 미국은 투자자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상황이다. 이번 G20 성명과 더불어 각국의 블록체인·암호화폐 육성에는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국내 업계는 세계 각국이 암호화폐 악용을 막아 건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는 가운데, 한국만 포지티브 규제를 유지한다면 4차 산업혁명에서 주도권을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지금이라도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하지 않으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결과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며 “결과가 나온 뒤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고 당부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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