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이성낙 지음 / 눌와 / 224쪽│1만8000원
[ 김희경 기자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권 강화와 왕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을 많이 그리도록 했다. 평양, 개성, 영흥, 경주 등 전국 곳곳에 그의 어진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전쟁과 변란으로 소실돼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게 유일하다.
이 어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른쪽 눈썹 위에 있는 지름 0.7~0.8㎝의 작은 혹, 피부의학 용어로 ‘모반세포성모반’이다. 2012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피부과학회의 ‘미술을 사랑하는 피부과 교수들의 모임’에서 이 그림의 혹을 본 세계 각국 피부과 의사들은 탄성을 쏟아냈다. 14세기 개국 군주의 얼굴에, ‘흠집’이라 볼 수 있는 혹을 그대로 그린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의 저자 이성낙은 “임금과 감독관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일”이라며 “태조 어진의 진본이 14세기 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해보면 이때부터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라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 원칙이 이미 확립됐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초상화의 시대’였던 조선시대를 재조명하고 여기에 담긴 의미와 조상들의 정신을 살펴본다. 저자는 독일 마르부르크 의대를 졸업하고 뮌헨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피부과 전문의로 활동했다. 현재는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상화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신분이 높은 특권층이었다. 이들은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최대한으로 미화해 그리도록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만큼은 달랐다. 실제 대상을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그리는 데 집중한 것이다.
저자는 519점에 달하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분석,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519점 가운데 161점은 보존 상태 등의 문제로 진단이 어려웠다. 하지만 368점 중 4분의 3에 달하는 268점에서 20종의 다양한 피부병변이 발견됐다. 점(후천성멜라닌세포모반점) 113점, 검버섯(노인성흑색점) 85점, 돌출된 검버섯(지루각화증) 37점 등이었다. 심지어 여드름 자국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당헌 서매수의 초상화엔 여드름 자국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저자는 “피부의 기름샘, 즉 피지선은 상대적으로 코와 입 주변에 몰려있다”며 “이를 따라 주로 여드름이 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선 전형적인 여드름 분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작은 흉터뿐만 아니라 피부병 자체도 여과 없이 그렸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필했던 홍진은 코가 주먹만큼 크게 부풀어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딸기코종’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비류’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같은 기록이 나온다.
초상화를 통해 한 사람이 급격하게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모암 오명항은 영조의 명을 받아 우의정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몇 달 후 생을 마감했다. 일본 덴리대 도서관에 소장된 그의 마지막 초상엔 얼굴이 매우 시커멓게 나온다. 사망하던 해에 그려진 작품으로 간질이 악화됐을 때 나타나는 흑색황달을 그대로 담아냈다. 그런데 같은 해 그려진 다른 초상에는 얼굴이 그렇게 검지 않다. 흑색황달의 전 단계인 황달 정도만 그려져 있다.
많은 사람은 과거 서양 미술이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가 영국 런던의 국립초상미술관에 있는 1400여 점의 초상화를 살펴본 결과 피부병변이 묘사된 것은 7점에 불과했다. 중국,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 초상화 모두 피부병까진 담지 않았으며 과시적인 성격이 강했다. 저자는 “과시나 권위와 동떨어진 피부병까지 가감 없이 묘사한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자랑스러운 선비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며 “순박하고 정직한 문화유산을 잘 관리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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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지음 / 눌와 / 224쪽│1만8000원
[ 김희경 기자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권 강화와 왕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을 많이 그리도록 했다. 평양, 개성, 영흥, 경주 등 전국 곳곳에 그의 어진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전쟁과 변란으로 소실돼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게 유일하다.
이 어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른쪽 눈썹 위에 있는 지름 0.7~0.8㎝의 작은 혹, 피부의학 용어로 ‘모반세포성모반’이다. 2012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피부과학회의 ‘미술을 사랑하는 피부과 교수들의 모임’에서 이 그림의 혹을 본 세계 각국 피부과 의사들은 탄성을 쏟아냈다. 14세기 개국 군주의 얼굴에, ‘흠집’이라 볼 수 있는 혹을 그대로 그린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의 저자 이성낙은 “임금과 감독관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일”이라며 “태조 어진의 진본이 14세기 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해보면 이때부터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라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 원칙이 이미 확립됐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이 책은 ‘초상화의 시대’였던 조선시대를 재조명하고 여기에 담긴 의미와 조상들의 정신을 살펴본다. 저자는 독일 마르부르크 의대를 졸업하고 뮌헨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피부과 전문의로 활동했다. 현재는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상화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신분이 높은 특권층이었다. 이들은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최대한으로 미화해 그리도록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만큼은 달랐다. 실제 대상을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그리는 데 집중한 것이다.
저자는 519점에 달하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분석,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519점 가운데 161점은 보존 상태 등의 문제로 진단이 어려웠다. 하지만 368점 중 4분의 3에 달하는 268점에서 20종의 다양한 피부병변이 발견됐다. 점(후천성멜라닌세포모반점) 113점, 검버섯(노인성흑색점) 85점, 돌출된 검버섯(지루각화증) 37점 등이었다. 심지어 여드름 자국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당헌 서매수의 초상화엔 여드름 자국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저자는 “피부의 기름샘, 즉 피지선은 상대적으로 코와 입 주변에 몰려있다”며 “이를 따라 주로 여드름이 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선 전형적인 여드름 분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작은 흉터뿐만 아니라 피부병 자체도 여과 없이 그렸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필했던 홍진은 코가 주먹만큼 크게 부풀어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딸기코종’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비류’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같은 기록이 나온다.
초상화를 통해 한 사람이 급격하게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모암 오명항은 영조의 명을 받아 우의정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몇 달 후 생을 마감했다. 일본 덴리대 도서관에 소장된 그의 마지막 초상엔 얼굴이 매우 시커멓게 나온다. 사망하던 해에 그려진 작품으로 간질이 악화됐을 때 나타나는 흑색황달을 그대로 담아냈다. 그런데 같은 해 그려진 다른 초상에는 얼굴이 그렇게 검지 않다. 흑색황달의 전 단계인 황달 정도만 그려져 있다.
많은 사람은 과거 서양 미술이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가 영국 런던의 국립초상미술관에 있는 1400여 점의 초상화를 살펴본 결과 피부병변이 묘사된 것은 7점에 불과했다. 중국,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 초상화 모두 피부병까진 담지 않았으며 과시적인 성격이 강했다. 저자는 “과시나 권위와 동떨어진 피부병까지 가감 없이 묘사한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자랑스러운 선비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며 “순박하고 정직한 문화유산을 잘 관리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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